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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igger warning : 약 폭력 묘사, 인체실험

Helios

적우

  결국,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다.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도, 지켜주겠다는 것도. 내가 그녀에게 알려주기로 했던 그 모든 것들도. 모든 게 허황된 꿈이었다.

 

* * *

 

  실험번호 1562, 태어나서부터 이름 없던 그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새하얀 실험복을 입은 어른은 여린 팔에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꽂아 약물을 투여하며 그가 Queen의 유전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아이의 아프다는 울음소리를 무시한 어른들은 그의 우는 소리를 무시한 채, 실험대 위에 눕혔다. 여린 소년은 반항을 시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진정제 투여. 그 중 가장 높아 보이는 사람이 명을 하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아이의 바늘이 꽂힌 수액 중간에 무언가를 투여했다. 그러자, 아이의 반항은 점점 줄어들고 마약이라도 먹인 듯 흐릿한 눈동자로 변해버렸다. 기다란 수액 바늘이 팔에 계속 꽂히는 모습이 괴기스러웠으나, 그곳에 있는 어른들은 익숙한 듯 그 모습을 괴기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잘 못하면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내색하지 않는 걸까. 하얀 실험복을 입은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들어도 알 수 없는 말을 짓 걸이며 마치 소년이 실험쥐라도 된 마냥 여러 주사를 놓고, 피를 뽑는 반복되는 실험을 계속했다. 오로지 그들이 속한 Black Swan을 위해.

 

  눈을 뜬 소년의 옆엔 처음 보는 소녀가 앉아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녀가 웃으니 따라 웃었다. 이름이 뭐야? 처음 들려오는 따스한 목소리에 소년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분명 울 것 같았으나, 흐르지 않는 눈물에 소녀는 소년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그 따스한 행동이 소년의 마음속 깊이 남았다. 소녀도 똑같은 실험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말 할 수 있어?”

 

  소년은 소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아이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니까. 투덜대듯 이야기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하나 싶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몇 번. 소녀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소년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뚱한 소년은 어떤 이름을 말해야 할까 말을 하지 않아, 소녀에게 답답함을 주었다. 역시 말을 못하는 건가. 실망을 가득담은 소녀가 일어나려하자, 소년은 소녀를 간신히 잡았다. 소년은 당황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표정에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시, 실험 번호 1562.”

 

  긴장한 듯 말을 더듬는 소년의 말에 소녀는 웃음을 터트리다. 고개를 내젓고서는 그거 말고, 이곳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이름은 없어? 물어 보지만 소년은 대답을 잘 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던 소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불렸던 이름은 그것뿐이라 고개를 살며시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소녀는 팔짱을 끼고서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더니, 방긋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없으면 내가 지어줄게! 방금 네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 생각났어! 주기락! 어때?”

 

  실험번호 1562의 첫 이름이었다.

 

  소년, 기락은 매일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의 이름도 묻지 못하고, 그녀의 상황도 알지 못한 채 재잘 재잘 말해주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 제 또래이기 때문일까, 같은 처지의 공감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그녀가 이름을 지어준 이후로 실험 자체도 아픈 것 없이 진행 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소녀와 함께라면 이 실험이 매일 지속 되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직은 그런 소녀를 그에게서 빼앗아갔다.

  소녀를 못 본지 며칠이 지났을까. 기락이 그리워하는 소녀대신 Key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기락에게 자신이 문제가 생기면 소녀를 지켜달라고 당부하며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계를 다루는 법 컴퓨터 사용법,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법 등- 틈틈이 그에게 주입을 시켰다. 아무것도 없는 머릿속에서 갑작스러운 주입식은 기락에게는 따라가기 벅찼으나, 소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모르겠으면 그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외우고, 또 이해하며 배워나갔다.

  어느 날 다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실험대 위에서 일부러 과다출혈을 내어 기락에게 수혈을 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 걷지 않고, 안겨 와서 기락의 옆에 눕힌다. 기락은 누운 소녀의 모습이 죽은 것 같아 그녀를 구하려고 손을 움직이려 애를 썼으나,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마취제를 놓은 듯 점점 눈이 감겨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기락은 이후, 일어날 일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소녀가 꿈에서 나왔다. 그녀의 생명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꿈인 줄도 모르는 기락은 그만하라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그저 기락에게 웃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팡, 무언가 터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슬프지만, 소녀와 함께인 꿈을 꾸고 있던 기락은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숨을 헐떡이며 죽을 것 같은 그 느낌을 다시 상기하다가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켰다. 밖은 여전히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온다. 간혹, 소녀의 이름과 Key의 이름이 들려 기락은 괜스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빨리 찾아! 뭐하는 거야 그걸 놓치고! 시끄러운 소리에 기락은 귀를 틀어막고 떨고 있었다. 화가 듬뿍 나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있어야 할까. 눈을 굴리며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기락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떨고 있는 수밖에.

  소란이 점점 잦아들자, 기락은 다시 누워 뜬 눈을 지새웠다. 아직 밖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간혹 들려오는 비명에 잠을 재대로 청할 수 없었기에. 방문을 여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기락은 최대한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없는 척을 했으나, 아이의 머리에서 나온 그 방법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방문이 열리고,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내었다. 벌벌 떠는 그에게 단 한 치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은 채, 점점 밝은 색으로 변하는 그의 머리를 쥐어 잡아 실험대에 거칠게 눕혔다.

 

  “감시 잘해. 언제 데리러 올지 모르니까.”

 

  심한 부작용이 실험들이 시작되었다. 몸이 아파오고 점점 머리색이 옅어져 금빛으로 물이 들었다. 실험 상황을 엿들어 보니, 그 때 그녀의 피를 받아서 생긴 부작용이라 추정했다. 혹여 이곳에 빠져 나가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어두침침했던 그 머리색과 달리, 금발은 이전에 보았던 태양과 같아 보였다.

  어느 날, 기락에게 찾아온 무리의 연구자들. 기락의 Evol이 완벽하게 구현 되면서 12신 중 Helios의 자리를 덜컥 맡겨 버렸다. 어린 나이에 자리를 잡은 곳은 그 아무도 그에게 무엇을 하라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능력 구현이라는 이유 하에 앉은 것뿐이기에. 기락은 눈치만 볼 뿐이었다.

  믿지 못한다니까요. Helios가 언제 배신해서 Key처럼 될지 모른다니까. 라는 말들이 소문으로 퍼지자, 기락을 다시 수술대에 눕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다. 어깨에서부터 내려오는 아픔에 어렸던 기락은 아픔의 비명을 내뱉었지만 그 방 안에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의 피부를 파 내렸다. 새 파란 눈이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 실험실의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고여 있는 상태의, 눈을 바라본 한 연구원은 그를 놓아 주었다.

 

  “그만, 아이의 Evol이 폭주하기 전에 안정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겠어.”

 

* * *

 

 

  [기락씨는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하기로 했나요?]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어요. 반짝이는 이들의 생활을… 그 때 부터였던 것 같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기락의 모습은 무척이나 반짝였다. 방송에서는 말갛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집에서는 진지하게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어릴 적 소녀를 찾는 것일까. Key라는 배신자는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 더 간절히 그녀를 찾길 원했다. 기락의 구원이자, 지켜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얼굴만으로는 찾지 못하는 걸까.

  어릴 적 기억하는 소녀를 찾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컴퓨터를 꺼버렸다.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연모시에서 살고는 있는 걸까. 세계적인 연예인인데, 혹시 머리색이 바뀌어서 못 알아 본걸까, 염색을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기락은 끝에선 그녀가 죽은 걸까라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요. 당신.

 

  연예계 활동 중, 바쁜 와 중 잠시 남은 시간으로 매니저 몰래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녀가 좋아 할 법한 과자들을 잔뜩 먹는 상상만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허니칩이 하나 남아있어 손을 뻗으려 했는데.

  이것은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그녀와 똑같은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알아볼까. 내가 많이 바뀌지 않았나. 기락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름을 말하려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연예인이라는 활동 중 베인 버릇에 자연스럽게 그녀와 말을 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왜, 웃을까. 그녀의 눈은 예전 어릴 적 부족했던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슈퍼스타 주기락을 보는 눈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기억하냐고, 쉽게 물어보지 못하고.

 

  "왜요?"

  "웃기잖아요. 방금 전까지 전광판에서나 보던 대스타하고 내가 과자 하나를 서로 갖겠다고 이렇게 꽉 잡고 있는 게…"

 

  그녀는 기락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감은 정확했다. 대스타 주기락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 자신에게 이름을 준 그녀가 아닌 걸까. 본능은 그 소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구원자, 나락의 끝에서 희망이 되어준. 내가, 잡아야 할 사람. 이끌림이 있었다. 어릴 적의 그 이끌림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녀와 이야기 끝을 맺었다. 유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제작사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전에 불린 이름은 이런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름을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Key가 그 시절의 기억을 잊게 한 것일까. 빠르게 머리를 굴린 기락은 어떠하든 그녀를 지켜야 할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Black Swan이라는 곳에서 그녀의 인생이 망가지지 않도록.

 

* * *

 

  다음 만남이 길어질 거라 예상했으나, 예상 외로 만나는 시간은 많이 있었다. 매니저의 배려, 또 그녀를 노리는 그들의 짓인가. 날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죽음이 드리워졌다. 기락이 그녀를 만난 이후, 조직 내에서도 그녀, Queen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다. 그들도 Queen의 유전자를 탐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정보를 건든 것이 문제였을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나, 다시 그녀를 또 다른 실험대 위에 놓고 싶지 않았던 기락은 그녀를 반드시 지켜 낼 거라고 다시 다짐했다.

  어느 날, 무대 위에서 기락은 공연을 시작했다. 많은 팬들의 함성과, 좋아해주는 목소리가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도중 팬들의 반응이 갑자기 끊겨버렸다. 점점 노래가 줄어들고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하자 점점 싸움으로 번졌다. 처음 기락은 당혹스러워 했으나, 이것이 Evol 제어력 때문에 생긴 것을 깨닫고 급하게 무대 뒤로 빠져나왔다.

  그 이후, 팬들의 소란이 잦아들지 않아 기락의 스케줄은 완전히 꼬였다가 점점 없어져만 갔다. Black Swan의 간부는 그 사태를 지켜보다 그에게 그만 두라고 말했고, 기락은 어떨 수 없다는 듯 은퇴 선언을 했다.

 

  아이돌을 그만 둔 그의 일은 그녀를 살피는 일이었다. 그녀의 주변에 자꾸 누군가가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감시카메라를 잘 피해 다니는 걸 보니,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Black Swan인가.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락은 짧은 시간 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은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가 잡히지 않기 위해, 무사히 빠져나와서 다시 만날 수 있게. 공포에 떤 그녀의 모습을 보자 더욱 차를 거칠게 몰았다. 그녀를 안고 싶다. 그녀의 향을. 두려워서 빼려 나가려는 그녀의 행동에 안심을 주기 위해 포옥 안았다. 따스한 손길로, 그녀를 보듬는다. 한숨을 집어 삼키고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녀를 안전하게 데려다 준 후에 집으로 돌아온 기락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그것은 유연과 만난 그 날부터 시작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실험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매니저는 걱정스럽게 황금색으로 시켜주었지만 저주처럼 금방 물이 빠져 버렸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거울의 그의 모습은 입가에 쓴 웃음이 걸린 채였다.

  잠시간 그렇게 보다가 다시 머리에 색을 입혔다. 밝은 황금색으로 그녀의 태양과도 같은 색으로 빛을 내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다 다시 옅어지는 것에 또 덧칠을 시작한다. 여전히 그의 입술에는 쓴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제어력이 상실된 Evol의 영향력이 폭파로 커졌다. Black Swan의 짓인 것을 알고 있는 기락은 어쩐지, 그녀를 데리고 다시 복귀하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복귀하라고 한지가 언젠데, 아직 하지 않냐는 무언의 압박감. 기락은 이를 악물고 전에 찾아보았던 초능력 증폭실험 보고서를 다시 훑었다. 어쩌면 자신이 될지도 그녀가 될지도 모르는.

  집중하고 있던 차에, 기락의 휴대폰 진동이 윙- 하고 울렸다. 매니저와 유연 외에 전화 할 수 없는 그 휴대폰이 울려 그는 번호도 확인 하지 않고 받았다.

 

  “네, 주기락입니다.”

  [놀음이 끝났으면, 이제 돌아오는 게 어때. Helios.]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움이 가득 담긴, Ares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울리자 기락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와 그렇게 잘 노닥대던 사람은 누구였지. 라는 대답을 하려고 했으나, 괜한 싸움은 하기 싫어 간단명료하게 곧이라는 답을 하고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가 올 것을 생각한 기락은 휴대폰을 끄고서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감시카메라 이동하는 그녀의 행동이 꼭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유연씨, 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가 그녀답다는 웃음을 짓고선 일어나 나섰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임을 예상하면서.

  TV타워 앞, 유연과 만나 그곳으로 향한 기락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팬 사인회 때 보았던 사람들, 공연 할 때 눈앞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자주 봐왔던 사람이기에 낯이 익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기락이 다가올수록 점점 목소리를 높여가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를 감시하는 그 조직의 짓인가. 기락은 한숨을 속으로 집어 삼키고, 유연을 붙잡았다. 갈수록 들려오는 폭력적인 소리에 기락은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다. 나 하나 때문에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팬들의 시선을 피해 겨우 들어온 TV타워는 이전에 보았던 모습에서 균열이 일고 있었다. 자신이 다녔던 길들이 모두가 균열로 일그러져있었다. 바쁘게 걸어가며 스케줄을 확인 하는 모습이 환영처럼 스친다. 그리웠던 모양이다. 다시는 그런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옆을 보니 불안에 떠는 유연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더욱 꼭 잡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달랜다.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요. 기락의 말 한 마디에 유연의 불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갈까요?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컴퓨터에 띄운 건물 도면을 바라보았다. 제일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어디인지. 그리고 감시카메라를 보며 Black Swan의 위치를 파악해 제일 안전하고 빠르게 갈 수 있는 방향을 찾아 그녀를 데려갔다.

  엘리베이터 안, 직원용 엘리베이터는 답답한 공기가 있었으나, 쉽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 있어 들키지 않고 90층까지 이동 할 수 있었다. 띵, 하고 다왔다는 신호음이 들리자 기락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엘리베이터 밖으로 이끌었다. 이제 위로 올라갈 수단을 다시 찾아본다. 이 층에 보이는 몇몇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기락씨, 여기 봐요.”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뻔한 기락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다가갔다. 창가 쪽, 꽤나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름다운 연모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짝 빛이 나는 유연의 눈을 보며, 기락은 웃음을 집어 삼켰다. 지금은, 안 돼.

 

“우리, 모든 일이 다 끝나면 또 와요. 그 때는 이렇게 무섭지 않고 밝은 분위기일 거예요.”

 

  유연은 그의 말에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락은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저 멋진 하늘을 바라보며, 끝이 꼭 이루어 졌으면 해요. 당신에게는 해피엔딩이 주어지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갑작스럽게 멀리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유연이 중얼거린 제 말을 물으려 하는 입을 틀어막고 근처 숨을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짧은 웅성임이 들린다. 기락의 걱정스러운 눈이 바깥의 그들을 보고 있었다. 다행이,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그곳을 지나쳤고 그녀의 입을 막았던 손을 풀어주었다.

 

  “미안해요, 허니칩씨. 갑자기 끌어안아서 그들이 이쪽으로 오는 바람에.”

  “… 괜찮아요. 기락씨가 아니었더라면 벌써 들켰을 테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하죠. 바깥 경치에 빠져서…”

 

  기락은 괜찮다는 웃음을 짓고서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서 다음 이동 장소로 향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 직원용 보다 더 컸지만, 답답함이 여전한 밀폐된 장소. 위험하긴 했으나, 가장 빠른 방법이 이곳이라서 이리로 왔는데.

 

  “오지 마요!”

 

  기락은 무언가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져 들어오려는 유연을 밀쳐 내고 혼자 아래로 떨어졌다. 위에서 들려오는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고 충격에 대비하려 했으나, 갑작스레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Evol 인가?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억지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기락은 긴장한 상태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억지로 연 사람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확실하게 열리자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그에게 해를 끼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는 그들의 앞에 나왔다. 좁은 상자 안에서 다 보지 못했던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기락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빠져나가지 못하면 안 된다. 아직은 그 쪽으로 다시 갈 때가 아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

 

  “Helios, 간부들이 모두 당신의 귀환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인지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더 기다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아이돌 기락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차가운 저음의 목소리. 무언가를 베어 버릴 것 같은 그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색의 머리색은 점점 색이 빠져간다.

 

  “믿지 못합니다.”

 

  하, 헛웃음을 흘린 기락은 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칫, 일개 조직원일 뿐이 이들은 그 눈에 지레 겁을 먹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한 발 물러섰다.

 

  “날 믿지 못한다고? 그럼 여태껏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겠지. 내가 아직 남아 있겠다는 말이 아니었다면. 난 이곳에 나타나지도 않았어. 그러니 비켜. 난, 그녀를 마지막까지 지킬 거니까.”

 

  그녀에게서 내가 사라진다더라도. 그의 차가운 말에도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보이는 조직원들은 다시 한 발 그에게 다가간다. 좁아질수록 빠져나가기 어려워 눈을 다시 굴린다. 얼른 그녀에게로 가야해. 나에게 겨우 이런 잔챙이들을 보냈다면 분명 그곳엔… 이를 악 물고 돌파를 시도했다. 하나하나, 밀어내고 치고서 틈을 향해 달렸다.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잔챙이들이라도 여러 명이 달려오면 그 또한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게다가, 그녀를 다시 만나 지켜야만 하는 체력도 보충해야 했다. 계속 달려오는 그들을 따돌리기 벅차 기락은 컴퓨터로 감시카메라 몇을 해킹해 폭발시켰다. 가벼운 폭발은 여러 개가 모여 큰 폭발로 일었다. 아마, 그녀가 있는 곳까지 영향이 있을 정도로 큰 폭발이. 하지만 단지 위협용이었으니 건물잔해가 쌓여 인명피해는 그렇게 크진 않았을 것이다.

  기락은 유연과 함께 탔던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다시 한 번 더 탔다. 숨을 고르게 쉬며 아까 뛰어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끝없는 추격전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띵, 하고 다시 음이 들려온다. 열림과 동시에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Artemis.”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지친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게다가 그녀를 건드렸다가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Key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자신을 데리고 올 함정을 파 놓은 것을 예상 할 수 있었다. 점점 말라가는 입술을 축인다. 주위를 둘러보며 투척용 소화기를 찾아 던지고, 유연을 잡아 이끌어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기락씨?”

 

  다시 차오르는 숨에 그녀를 보며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빠져서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걱정 가득한 눈을 한 그녀를 보며 다시 웃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밑에서 점점 파열음이 들려온다. 무너지고, 균열이 일어 중심잡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무언가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락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뛰고, 또 뛰었다. 계단의 끝, 밑의 무너짐이 보인다. 멈춰 선 기락은 유연을 바라보았다.

 

  “기락씨?”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지금 그 시간만큼은, 정지 된 것처럼. 유연의 눈을 응시한다.

 

  “지금부터 명령합니다. 내 통제 범위에서 당신은 나에게 귀속됩니다. 이제 옥상 문으로 나가서 문을 잠급니다. 아무도 들여보내선 안 됩니다. …나를 포함해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자 유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의 몸은 그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기락의 말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제 모습을 볼 수 없을 때까지 억지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한계의 끝에 다다랐다. 죽음이 다가 옴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소는 따스하고 찬란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문을 잠그려 할 때 기락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날… 기다려 줘요. 허니칩씨. 기다려 줄 거죠?”

 

  문이 닫히자마자 중력으로 인해 밑으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죽는 건 아니라 확신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두려웠다. 혹시나 그대로 죽일까 봐.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의 손을 잡아 끌어주는 Artemis의 손에 끌려온다. 아까의 그 층이었다.

 

  “아직 너의 쓸모는 남아 있으니 죽는 건 아직 이야. Ares도 널 살려두라고 했고.”

 

  마지막, 힘을 쓴 기락의 모습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밝았던 금발은 점점 옅어져 은발로 변해 버린다. 차가운, 모습으로.

 

  “이만 철수 한다. P029는 실패 했다.”

 

  힘이 빠진 기락을 일으켜 세워주는 착한 사람은 존재 하지 않았다. 억지로 일어나 비틀대면서도 그들을 따라갔다. 그것이 그의 숙명이었으니까. 그녀가 걱정 되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무력하기만 했다.

 

* * *

 

  다시 돌아온 이 조직에서 시작되는 건 어릴 때 강제적으로 하려고 했던 그 문신이었다. 전문가의 손길이 아니라 여전히 아팠으나, 이를 악 물고 참아내었다.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다시 실험실로 끌려갈 것을 알기에. 기락, 아니 Helios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이 아닌 모습을 바라보곤 마음을 먹었다. 이곳에서 그녀에게 제공 할 수 있는 정보를 알아서 그녀에게 가져다주자. 라는 다짐과 함께 제 얼굴을 툭툭 쳤다.

 

  “정신 차려서 행동하자.”

 

  그런 Helios의 각오와는 다르게, Black Swan 내에서는 그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간간히 회의에만 들어가고 정보를 모아 둘 뿐 그 외에는 안에서 가만히 있는 거나, 잡일을 도맡아 할뿐이었다. 감시자는 얼마 없었으나, 빠져 나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은 탓에 쉽게 나가지도 못했다.

  어느 날, 회의가 끝난 후, 자신의 방으로 온 그는 낯선 이가 제 자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경계심을 끌어 올리다 낯이 익은 것 같아 천천히 다가갔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눈치네.”

  “당신은…”

 

  순간 Helios는 유연과 얼굴이 똑같은 Queen이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상기했다. 아마, 그녀일 것이다.

 

  “무슨 볼 일이지? 급한 게 아니라면 나가 줬으면 하는데.”

 

  날카로운 말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내가 네가 알던 유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구나. 맞아, 네 생각대로 난 그녀가 맞으면서도 그녀가 아니야. 그녀는 단지, 순수했던 시절의 그녀일 뿐인걸.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구하려는 나약한 인간이지.”

 

  Helios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달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그 또한 예상 했던 건지. Queen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문신이 새겨진 그 부분을 쓸고는 안타까운 미소를 짓고.

 

  “넌, 네 목숨을 바꾸어서라도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줄 테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돌아 갈 테니까.”

 

  여전히 듣기만 하던 그는 그녀를 지나쳐 침대에 앉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한 행동이었으나, 그녀에게 끼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 보다 순수한 유연의 모습을 더 좋아하니까. 오염 된 이 색을 알지 못하는 그녀를. 하하- Queen의 웃음소리가 그의 방을 울렸다. 똑같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끼치는 웃음소리인건 그만의 착각인 걸까. 그렇게 웃다 그친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잘 들어 Helios. ‘나’가 위험하니까, 잘 지켜. 내게 잡아먹히기 전에.”

 

  짧은 경고의 말을 둔 그녀는 유유히 그 방에서 빠져 나갔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위험해.

  갑자기 내부에 소란이 일었다. Queen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로 인해 감시가 줄어들고 내부에서 외부로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Helios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지프차를 타자마자 떠오르는 얼마 전 Queen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녀를… 그 생각에 미치자, Helios는 빠르게 감시카메라로 유연을 찾았다. 그녀는 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Queen은 근처에서 보고 있겠지 추측을 하고, 제 옷 안에 총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그 후, 엑셀을 밟아 유연에게로 향했다.

유연이 사람들에게 쫓기는 것이 보였다. Helios는 그녀의 옆에서 달리며 문을 열고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태웠다.

 

  “문 닫아.”

  “……?”

  “차에서 떨어지고 싶다면 닫지 않아도 돼. 속도 낸다.”

 

  갑작스럽게 태워진 유연은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놀라 문을 닫고 벨트를 매었다. 얼굴도 확인하기 전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이따 하지?”

 

  유연을 쫓아오던 사람들은 차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 뛰어 오며 차에 무언가를 던졌다. 창문을 열지 않아 들리지 않았으나, 그녀를 향한 저주의 말이었으리라. 이를 악물며 운전에 집중을 했다. 사람들을 다 따돌렸으나, Queen의 부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유연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내려.”

  “… 고마워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연의 모습에 웃어 주고 싶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인 걸요. 라며 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의 모습은 주기락이 아닌 Helios일 뿐이었다. 내리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팔을 아프게 잡았다. 다시 새겨 주어야 한다. 당신이 사는 이 세계는 위험하다고. 팔이 아픈지 인상을 쓰는 유연을 보며 살짝 놓아 줬으나, 잡은 팔을 완전히 놓아주진 않았다. 그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거야? 관두고 집에 있어. 이건 네가 할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네 존재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다. 유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뭔데 내 일에 참견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다 문을 쾅 닫고 돌아갔다. 이럴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 한스러워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을 때,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위기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Queen.”

  “갇혀 있는 삶이 따분하지 않았어? 내 덕에 나온 거라면 고마워 해주었으면 하는데.”

  “왜 여기에…”

  “사실은, 이게 모두가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야. 네게 절망을 심어주려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에 퀸은 차에서 내렸다. 걷는 방향은 유연의 집이었다. 일부러 기다린 것인가 이 순간을 위해서? 기락은 차에서 내리려 했으나, 뭔지 모를 중압감에 일어나지 못했다. 차 안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Queen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꼭 안았다. 마치, 몇 년을 보지 못한 친구처럼. 그녀는 반항하려다가 멈추었다. 이것도 Queen의 능력일까. 이를 악물고 움직이려 해도 1cm도 움직이지 못했다. 총을 챙긴 이유도 없이 자책감을 가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결국 Key의 입장에서도 주기락의 입장에서도 그녀를 지키지 못했어. 차라리, 이 아이가 그대로 죽었다면. 이 지경 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그녀의 입모양이 그대로 뇌리에 전달되는 것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녀와 하나가 됐을 때, Helios의 눈앞에서도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무거웠던 몸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다시,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비참한 기분을 꾸역꾸역 누르고 운전을 하며 다시 복귀했다.

  도착하자마자 불려간 곳은 간부의 방이었다. 왜, 개인행동을 하냐. 등의 잔소리와 같은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Queen을 만나러 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또, 그녀 혼자뿐이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Helios를 본 Queen은 비웃음을 흘렸다.

 

  “아직 모르겠어? 기락씨, 안녕하세요! 하고 웃던 유연은 죽었어. 네가 알던 모습은 모두 내 과거일 뿐이야. 수많은 시간 속에서 무참히 짓밟혀 왔던, 지금 세상을 구하려던 유연은 이곳에 없어. 세상만을 구하려는 바보 같은 모습은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구하려 했던 그녀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것도 구하지 못한 채로 절망을 가득 담았다. 머리에 쿵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 했던 일이 무엇이지? 마지막의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까. 이 마음이 괜찮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간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Helios.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은 Queen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유연과 똑같은 인간이지. Key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이룰 수도 있어.”

 

  그를 혹하게 할 만한 말들을 준비해 놓은 것 마냥 이야기에 그는 점점 그녀의 달콤한 말에 빠져들었다. 정말 그걸로 된 거겠지. 혼란스러워 하는 그를 보듬어 주는 Queen은 다시, 아기를 달래듯 조곤조곤 이야기 해주었다. 이대로 내게 잘 따르면 된다고.

  Black Swan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Queen의 뜻대로 흘러가고, 세상의 인간들을 짓밟는 행위를 저질렀다. Helios 또한, 그렇게 인간들을 짓밟았다. 밟을 때 마다 환청이 들렸다. 유연의 목소리로 안 된다고 외쳤으나,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며 그들을 죽여 나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이런 것들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계속 들려오는 환청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Helios는 Queen을 찾아갔다. 그녀에게 가 이야기를 한다.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잊으라는 말을 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힘들면 네 스스로 지워 보는 건 어때?”

 

* * *

 

  나는, 그녀와 한 약속을 아무 것도 지키지 못했다. 그런 내가 그녀를 기억할 자격이 있을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얼굴을 씻어 내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주기락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Helios의 모습일 뿐이었다. Black Swan의 정점을 찍고 있는 Queen의 말을 상기 했다.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몰랐다. 거울을 짚어 바라본다. 하늘을 닮았던 파란 눈동자가 탁하게 빛나다가 황금빛으로 바뀌자 입을 열었다.

 

  “명령한다.”

 

  내 목소리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이전의 그렇게 즐겁게 조잘대던 그 목소리가 아니라. 나는 쓴웃음을 집어 삼키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L&P

Black Swan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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