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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토리 15장부터 18장 사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린 태양
Helios
향비파
남자를 햇빛 아래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가게 문을 열려다 말고 깜짝 놀라서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남자는 2주 전 처음으로 이 골목에 나타났다. 내 가게는 새벽 12시 반에 마감을 하고 1시에 문을 닫는다. 남자는 항상 가게 왼쪽 골목에서 나타나 큰 길로 나가기 전에 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곤 했다. 내가 남자를 기억하는 건 남자가 항상 같은 패턴으로 나타나는 것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이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과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2주 간 단 한 번도 주변 가게를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가게 문을 닫고 돌아서는 동안 줄곧 그러했다. 골목 안 가게들은 내 가게를 제외하고 모두 음식점이었고 새벽 두세 시까지 영업하는 곳이었다. 인터넷에서도 제법 알려진 가게들이 줄지어서 있다. 그러나 남자는 먹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골목을 지나가곤 했다. 아침 10시쯤에 가게 문을 열고부터는 이 근처에서 계속 있어서 남자가 다른 시간대에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잘 먹지 않는 사람인 걸까. 먹을 것을 무척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음식들을 나열하던 아이돌과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나는 조만간 라이브 투어가 있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며 울상을 짓던 몇 개월 전의 아이돌을 떠올리고 웃었다.
남자는 평소와 달리 품에 커다란 이동장을 안고 있었는데, 스치는 사이에 본 바로는 털이 복슬복슬한 고양이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와 고양이의 조합은 어느 모로 보나 맞지 않았다. 굳이 떠올린다면,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에서 달빛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설표의 털이 남자의 머리카락과 더 어울렸다. 남자는 이동장을 품에 안지는 않았지만 함부로 다루지도 않았다. 흔들림 없는 남자의 손에서는 고양이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골목이 아닌 큰 길로 향했다. 그리고 다섯 시간쯤 후에 다시 이동장을 들고 나타났다. 여전히 표정에 감정이 없었고 고양이도 울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는 보지 못하려나. 다시 가게 앞을 지나쳐 항상 나오던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정산서를 잡았다.
손님 두어 명을 상대하고 다시 정산서와 씨름을 하다가 슬슬 닫을 시간인가 싶을 무렵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갈색 코트에 검은 서류가방과 아주 짧게 민 머리가 눈에 띄었다. 아직 옷을 살 수 있느냐는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감까지는 10분도 안 남았지만 오늘 매출을 생각하면 한 벌 더 버는 게 나았다. 손님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밤늦게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곧장 매대로 향했다. 옷을 보고 유리창 밖을 한 번 보고 오른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다시 옷을 집었다. 그러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길 반복했다. 나는 손님에게 다가가 찾는 옷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손님의 품에는 옷이 제법 안겨있었다. 꽤 걸리는 편이었지만 몇 주에 한 번씩 오던 진상 손님보다는 나았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남자가 가게 앞을 지나갔다. 평소와 달리 가게 안에서 본 남자는 가로등에서 떨어지는 노란 불빛을 받아서 새하얀 은발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주기락?”
“주기락 팬이신가 봐요?”
화들짝 놀라서 앞을 보니, 손님이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고 계산대 위엔 옷이 쌓여 있었다.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 옷을 집었다. 그래도 오래 가게 일을 한 덕택에 말은 그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6년 됐어요. 아직 연모시에 주기락이 오기 전이었는데 우연히 주연 영화를 보게 됐거든요.”
“오래 됐네요. 은퇴했잖아요? 아직도 좋아해요?”
“팬심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이상의 답변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괜히 눈을 굴리다가 다시 말했다.
“근데 아까 방금 지나간 사람이 주기락이랑 너무 닮아서 놀랐어요.”
“그렇게나 닮았어요?”
“가로등 불빛이 비치면서 머리색이 금색으로 보였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웃어보였다. “물론 머리색이나 표정 같은 것들은 전혀 안 닮았지만요.” 다시 창밖으로 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골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나는 손님에게 가격을 말해주었다.
남자는 다음날 아침 10시쯤 다시 가게 앞으로 나타났다. 이번에는 이동장이 아닌 그 품에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아주 편한 자세로 몸을 맡긴 고양이는 몸이 굉장히 커서 남자의 상반신을 대부분 가렸다. 남자는 고양이를 한 팔로 안고 변함없는 얼굴로 가게 앞에 서있었다. 나는 그제야 무엇이 또 다른지 깨달았다. 움직이지 않는 남자를 잠시 보다가 쥐꼬리만한 용기를 쥐어짜서 다가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가게 문을 열 때까지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면 잠시 들어오겠느냐 물었다. 고양이도 추울 거라느니 하는 민망한 핑계도 댔지만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서 한 번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고양이의 파란 눈동자는 어떤 수심도 담기지 않은 듯 깨끗하여 전에 얼핏 보았던 남자의 것과 대비되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남자가 나를 보았다. 흐린 하늘같던 그 눈이 가만 구름 뒤에 가려진 태양이 내는 흐린 빛을 닮았음을 알았다. 손에서 핏기가 빠져나간 듯 서늘해서 양손을 맞잡았을 때,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양이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라졌다. 남자의 팔에 머리를 부비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와 계산대 안에 앉았다. 아직 손에 핏기가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남자의 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전날 잡았던 정산서를 다시 집었다.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그 날 새벽도 남자는 어김없이 골목에서 나타났다. 빠르게 걸어가는 그를 차마 부르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며 문을 마저 잠그고 뒤돌아섰을 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마감시간 즈음에 온 손님이었다. 남자가 사라진 방향에서 가볍게 달려온 손님은 다시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가 불 꺼진 가게를 보고 곧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어제도 옷을 사지 않으셨나요?”
“동생이 한 벌 더 사달라고 했거든요. 여기 옷을 무척 맘에 들어 했어요.”
“어쩌죠? 지금은 이미 마감시간이 지났어요.”
“딱 한 벌만 사면 안 되겠죠?”
“내일 다시 오시면 문을 열어둘게요.”
손님은 어깨를 늘어트렸다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인사를 건네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손님은 그 자리에 계속 서있었다. 음식점 사이의 골목을 빤히 보던 그는 내 시선을 눈치 채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날 나는 약속대로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도 문을 열어두었고 손님은 어김없이 가게에 나타났다. 매대 앞을 서성이며 잠시 옷을 보더니 맨 앞에 잘 보이게 진열해둔 검은색 모자와 보라색 브로치가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집어 계산대로 가져왔다. 옷을 포장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손님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고요한 모습을 보며 나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나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다른 건지 고민하는 사이에 다시 손님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고 그 때는 이미 다시 예의 그 서글서글한 웃음을 달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손님은 미안하다며 넉살 좋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굉장히 새하얀 사람이 지나가서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네요.”
“새하얀 사람이면, 은발에 하얀 점퍼 코트를 입은 남자요?”
“바로 아시는 걸 보니 단골인가 보군요!”
“손님으로 온 적은 없고 매일 이 시간쯤에 이 앞을 지나가는 걸 본 정도예요.”
“그래요?”
손님의 눈이 왼쪽으로 굴러갔고 나도 모르게 왼쪽을 보았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손님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 사람, 이 동네에서 보이기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한 2주 정도 됐어요. 그제부터는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더라고요.”
“고양이요?”
“네. 좀 커다란 고양이였는데, 굉장히 잘 따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요즘 낮에도 포착되고 있었군. 흠칫 놀라 손님을 봤지만 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웃어보였다. “그 고양이, 키우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럴 만한 처지가 못 되는 사람이거든요. 잠깐 주운 거겠죠. 금방 다른 데에 보낼 겁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남자와 아는 사이냐고 물었고 손님은 망설이듯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전에 안 좋게 헤어진 아는 동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굉장히 잘 아는 사이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옷이 든 가방을 받아들고 손님은 인사를 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 모습을 보며 둘이 아는 사이라 비슷하게 느껴진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잠을 설치고 아침에 문을 열기 위해 가게 앞에 왔을 때, 문간에 꼿꼿하게 앉아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는 머리와 귀 뿐만 아니라 꼬리 부근까지 회갈색 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새하얬다. 남자의 품에 안겨있을 때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내 허벅지에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내 키가 크진 않지만 고양이가 이 정도면 정말 큰 거였다. 본가에서 엄마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무릎 근처에 오던 연갈색 고양이가 내게는 더욱 익숙했다. 이게 사진으로만 보던 메인쿤이라는 종인가 싶었다. 나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고양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옆에 앉아서 말을 걸었지만 발을 핥을 뿐 나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핥고 다시 말을 걸었다.
“춥지 않니? 네 주인은 어디 갔어?”
가을이 지나고 있어서 이 주변 길고양이들도 따뜻한 곳으로 가는 일이 많았다. “혹시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병원에 가고 너만 남겨진 거니?”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나는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하긴 고양이만 안 보이는 게 아니다. 연모시에 독감 바이러스가 퍼지고 난 후부터는 항상 북적이던 이 거리도 조금씩 한산해지고 있었다. 며칠 전에 감기 기운이 보인다며 잠시 병원에 다녀온다던 옆집 꼬치가게 주인은 그 후로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이제 내 가게도 매출이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매일 가게로 나오고 있었다.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숨을 살짝 뱉었다. 넌 건강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호스, 여기 있었네.”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렸다. 나는 바로 돌아보았고 그와 동시에 팔 부근을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스치며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그 품이 무척 자연스러워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 같았다. 키우는 건 아닐 거라던 손님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는 내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양이를 잠시 보았다. 내가 다시 말을 건 것은 남자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스쳐지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고양이는 기르고 계신 건가요? 이렇게 외출을 시키시는 건 위험해요. 자칫하면 잃어버릴 수도 있고.”
남자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내 발걸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그 애 이름이 호스예요? 제법 큰 것 같던데 예방접종은 하셨어요?”
그제야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겨우 마주한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가슴께가 싸해지는 감각은 정말 오랜만에 느낀다. 몇 년 전에 사고를 당할 뻔 했을 때 느꼈던 감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남자 쪽으로 뻗던 발이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동안 무관심한 듯 변화조차 없던 남자의 얼굴이 드디어 일그러졌다.
“왜 이렇게 신경 쓰지? 아무리 봐도 이쪽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던데. 남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취미인가?”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턱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남자의 차가운 눈을 마주 보았다. 겨울 바다를 비추는 시린 태양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뗐다.
“그냥, 그냥! 요즘은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게다가 당신은 매일 같은 시각에 여기를 지나가잖아요.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과한 호기심은 독이 될 뿐이야.”
“당신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건 나만이 아닌걸요.”
나도 모르게 어제 손님과의 대화마저 남자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무척이나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언제부터 여기를 지나다니고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남자의 눈이 굉장히 잘 아는 지인이라고 했다는 말에 가늘어졌다. 그가 다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급하게 숨을 삼켰다. 남자가 발톱을 감추고 있던 맹수처럼 이를 드러냈다. 그 앞에서 나는 입을 달싹일 수조차 없었다.
계산대 안에서 열리지 않는 가게 문을 몇 시간이고 쳐다보다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문을 닫기로 했다. 이미 시간은 밤 9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계산대를 정리하고 가게 불을 점검하고 문을 잠그면서도 계속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무섭다고 생각했으면서 왜 계속 관심을 가지게 될까. 이유는 연이어 떠올랐다. 시린 태양 같은 남회색 눈동자, 눈에 띄는 하얀 외모, 매일 비슷한 시각에 나타나는 행동 패턴, 품에 안고 있던 커다란 고양이, 그리고 주기락. 고양이에게도 관심이 갔지만 가장 큰 원인은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는 거리에서 볼 수 없게 된 나의 아이돌을 떠올렸다. 주기락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 이후로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나를 비롯한 팬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그리고 있었다. 독감 바이러스에 걸려서 혼자 있는데 외로울 때마다 주기락의 노래를 들으며 버티고 있다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도 자주 보일 정도였다. 나 또한 이렇게까지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도, 누군가의 음악에 빠져본 것도 처음이라 더욱 그러했다. 남자는 분명 그 얼굴을 빼고는 어디도 주기락과 닮지 않았다. 차라리 주기락의 쌍둥이라면 그나마 믿을 법 했다. 게다가 내가 그동안 보아온 주기락은 호의에 위협으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도 관심이 가는 건 역시 팬심 때문일 터였다. 한숨을 짧게 내쉬며 신호등 앞에 섰다.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남자를 보았다. 평소 보던 그 여유로운 발걸음에 속도가 붙어있었다. 얼마 안 가서 편의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로등이 비추지 않는 곳이어서 그대로 그를 놓쳐버렸다. 초록불이 켜지지 않는지 다시 보는데 건너편에 익숙한 검은 모자가 보였다. 분명 어제 그 손님에게 팔았던 모자였다. 평소 발품을 파는 도매 시장에서 친한 사장님에게 겨우 얻은 상품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손님은 어제와 달리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오른손에 든 서류 가방조차 익숙했다. 손님도 빠르게 걸어 편의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굳어있는 표정이 가게에서 남자를 보던 때와 비슷했다. 그보다 더 섬뜩하게도 느껴졌다. 그 손님이 남자에 대해 묻던 대화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동시에 오늘 남자에게서 받은 위협도 같이 생각났지만 더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황급히 손님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지만, 그 사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골목 안으로 발을 천천히 옮겼다. 과한 호기심은 독이 된다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조차 정말 호기심뿐인지, 무언가 다른 것이 내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느낌을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해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검색을 하다가 주기락의 화보를 처음 보았을 때였다.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웃지 않는 날카로운 표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때 생긴 호감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그 때는 미약하지만 경계를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3번째 골목 모퉁이에서 안쪽을 들여다본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새하얀 태양이 그 자리에 서서 덤덤하게 칼을 털어 품에 넣고 있었다. 그 발밑에 흩뿌려져 있는 검붉은 자국들과 쓰러져있는 검은색 트렌치코트와 옆에 떨어진 익숙한 모자가 눈에 띄었다. 뒷목이 뻣뻣하게 굳고 숨이 멎고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세게 뛰기 시작했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마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은 내가 아닌 내 심장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남자가 쫓아오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한 채 계속 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