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약간의 폭력 묘사와 중판 <장막 뒤의 장>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Pradise lost
주기락
에셀
“꺅! 주기락이야!”
연모 시의 한 빌딩 가. 어떤 이의 비명 같은 외침이 울리자 길 가던 사람들 몇이 멈춰 서서 높이 솟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시내의 빌딩 한 면을 커다랗게 채운 전광판에 누구나 인정하는, 찬란한 태양같은 아이돌 주기락의 다양한 흑백 모습이 지나갔다. 그동안 그가 낸 앨범의 재킷용 사진이었다. 추억을 일깨우는 듯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함께 바뀌던 흑백 영상이 공백으로 바뀌며 커다란 광고 문자가 한 문장씩 떠올랐다.
【 전국 투어 일 주년 이벤트
주기락을 완성시킬 당신의 선택은?
B.S 엔터테인먼트 공식 SNS에서 지금 바로 투표하세요! 】
주기락의 콘서트 확정 정보에 탄성이 튀어 나왔고, 뒤이어 궁금증을 자아내는 홍보 문구의 진의를 서로 묻는 일행의 대화 소리가 이어졌다.
“저게 무슨 말이래?”
“몰라, 들어 가 보면 알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서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B.S 엔터테인먼트의 공식 SNS에 들어가자 주기락의 콘서트 포스터 사진 아래 투표란이 있었다. 이번 연모 시 콘서트에서는 팬들이 골라주는 컨셉으로 무대 스타일을 꾸민다는 내용이었다. 1번이 천사, 2번이 악마였다. 그 자리에서 내용을 확인한 팬 몇이 방방 뛰며 환호했다.
“이거 진짜야? 난 악마에 투표할래!”
“어머, 주기락이면 천사지! 생긴 걸 봐, 저렇게 순수해 보이는 사람한테 악마가 가당키나 하니?”
“그건 모르지! 저런 사람이 의외로 잘 어울릴 수도 있어~”
전광판의 광고는 진즉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투표하면서 주기락에 대한 평가를 재잘거렸다. 사람들에게 있어 주기락의 인상은 무결하고 완벽한 태양이었다. 환한 미소와 달콤한 미성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청년. 누구나 태양 같은 그를 사랑한다. 빛으로 더러운 어둠을 물리치는 것 같은 이미지가 깊이 박혀 있었다. 오죽하면 그의 노래가 우울증 환자의 심리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할까.
그러나 사람들은 간과했다. 어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무결한 것은 가능한 것인지. 어쩌면 그에게 무결의 이미지를 덧씌워놓고 제가 꿈꾸는 환상의 모습이길 덧씌운 건 아닌지. 그리고 주기락이란 남자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영리한 계략가였다.
“락군 SNS 난리났지? 팬들이 컨셉 투표 누른다고 서버 다운까지 걸렸다며.”
“네, 보셨어요? 기락 씨 인기가 이 정도예요!”
주기락의 머리를 스타일링하는 리사 원장과 분장이 끝나길 기다리는 코디가 옆에서 말을 나누었다. 주기락은 의자에 앉은 채로 제 칭송을 듣자 드라이를 받으며 웃었다. 백합처럼 미려하고 해사한 그의 웃음이 헤어샵에 밝은 빛을 뿌리는 듯 했다. 옆에서 조용히 주기락을 힐긋힐긋 보던 유명 여배우도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래요? 오전에 봤을 때 십만 명 넘었던데 지금은 몇 만 넘었어요?”
“사십 만이요!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들 투표했다나 봐요. 기락 씨는 좋겠다. 이렇게 사랑받아서요!”
B.S 엔터테인먼트에 온 지 몇 주도 안 된 병아리 같은 코디는 SNS 소식에 고무된 듯 뺨이 상기되었다. 그녀는 제가 처음 맡은 연예인이 스타 Kilo, 주기락인 것에 자부심을 가진 여자였다. 리사 원장과 주기락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신입 코디가 귀여운 듯 픽 웃었다.
“이번 코디 언니는 귀엽네~ 그렇지, 락군?”
“네. 귀엽기도 하고, 일도 잘해요.”
주기락은 제 생방송 용 의상을 가져와 기다리고 있는 코디에게 윙크했다. 씩 웃는 주기락의 윙크에 얼굴이 새빨개진 코디는 수줍게 손사래를 쳤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과찬이에요!”
“글쎄, 이번 의상 고른 것도 제법인데. 코디 언니 일 잘하는 것 맞아.”
“그렇죠? 골라주는 의상 다 제 맘에 들어요. 콘서트 컨셉도 잘 골라줄 거예요.”
“컨셉이 천사와 악마라고? 진부하지만 이걸 또 락군이 소화한다고 생각하면 느낌이 색다른걸. 스타일리스트랑 코디 언니 어깨가 무겁겠어.”
“안 그래도 밤낮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기락 씨에게 어울리는 분위기를 찾으려고요!”
“고생하네요.”
주기락은 코디의 말에 낮게 쿡 웃었다. 코디를 거울 너머로 보는 그의 눈빛과 표정이 짧은 순간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이 변했다가 다시 미려한 햇살 같은 느낌으로 돌아왔다. 머리 스타일링이 끝난 주기락은 어떤 패션 잡지를 유심히 보다가 매니저가 들어오는 소리에 일어났다.
“기락아, 준비 다 끝났어?”
“옷만 갈아입으면 돼.”
의상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간 주기락은 분장이 묻지 않게 조심히 옷을 갈아입고 나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마른 쇄골과 탄탄한 가슴이 드러난 그의 캐주얼 수트 차림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흡족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 매니저는 신입 코디를 칭찬했다.
“우리 코디님, 의상 잘 골랐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네, 네! 열심히 할게요!”
“기락아, 어서 가자.”
“응, 형. 잠시만.”
거울 앞에 서서 새 피어싱으로 갈아 끼우는 주기락의 길고 마른 손가락과 귓불에 모두가 집중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마저 매혹적이면서도 질 낮지 않은 느낌이 묻어나는 그의 모습에 모두 홀린 듯 했다. 매니저 임우영은 속으로 ‘우리 기락이는 역시 최고야.’라고 생각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주기락의 방송 스케줄은 단언컨대 살인적이었다. 신입 코디는 의상을 끌어안고 밴에 대기한 채로 꾸벅꾸벅 조는게 일이 되었고, 그녀의 스타는 그 스케줄을 소화하고도 지친 기색없이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매니저 역시 주기락의 공연을 모니터링하느라 쉴 틈 따위 없는데도 주기락과 붙어 다니며 그를 독려했다. 두 사람은 꽤 잘 맞는 콤비였다. 깊은 말은 들은 적 없지만 주기락이 매니저를 친형처럼 여기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주기락은 유년기 때 연예계에 데뷔한 사람이다. 몇 년 간의 커리어만큼 눈치도 어지간히 키웠을 텐데, 자기 매니저를 저렇게 가족처럼 신뢰하는 연예인이 있기나 할까. 왠만한 흠결조차 찾을 수도 없다. 대체 주기락은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일까? 코디는 그의 의상을 담당한 첫날부터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람이 화면 속에서나 화면 밖에서나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는게 가능하겠느냔 말이다.
“주기락 씨 코디 분, 거기 서 있지 말아요! 거긴 접근 금지선이 그려져 있다고요! 발밑을 잘 봐요.”
“앗!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주기락 콘서트를 리허설 촬영 중인 카메라 감독에게 핀잔을 들은 코디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리허설을 하고 있던 무대 위의 주기락도 인이어를 빼고 노래를 멈추었다. 그의 하얀 얼굴 위로 맺힌 땀방울이 주홍색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주기락은 검은 트레이닝 복을 입고서 춤과 노래를 본 공연처럼 소화하고 있었다. 그는 황망해하는 제 코디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조금 쉬죠. 코디님, 목마르지 않아요?”
“네? 아아, 그렇죠! 제가 매니저님 대신 마실 것 가져올게요!”
“천천히 다녀와도 돼요.”
주기락은 본 공연에 앞서 카메라 위치와 구도를 신경 써야 하는 리허설 때문에 예민해진 카메라 감독의 눈화살에서 코디를 구해 주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카메라 감독은 열심히 연습하는 주기락을 돌아보고는 긍정적인 사인을 보냈다.
“역시 주기락 씨는 프로야! 나무랄 구도가 없어요!”
“하핫, 그래요? 노래 부르느라 바빠서 따로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보조 카메라를 든 사람들도 주기락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슈퍼스타답게 겸손하고 예의도 바르다는 말이 그치질 않았다. 카메라 세팅에 예민해진 분위기를 햇샅 같은 미소 한 번으로 사르르 녹이는 그의 매력은 아무나 가진게 아니긴 했지만. 주기락은 카메라 감독에게 잠시 쉬라고 일러두고서 제 대기용 의자에 놓인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니 수십 개의 문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두어 개를 뺀 메시지는 일부러 저장하지 않은 번호로 온 것이었다.
열다섯번 째 실험, 퀸, 각성… 의미 모를 단어들이 메시지 안에 섞여 있었다. 주기락은 전에 없이 냉담한 얼굴로 메시지를 삭제했다. 주기락이되 주기락이지 않은 모습. 메시지를 삭제하고 나서야 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눈매를 부드럽게 휜 그는 조그만 소리로 기대감을 흘렸다.
“곧 널 만날 수 있어.”
‘그녀’의 사진은 건네받은 문서에 있었지만 생생한 목소리와 눈빛이 궁금했다. 아마 그 날처럼 따뜻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사랑스러운 사람이겠지. 그녀의 기억을 떠올린 주기락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고요한 그늘에서 안식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 날을 맞이하려면 그녀를 지켜야 한다. 주기락은 전원을 끈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의자에 앉아 기댔다. 공연 홀 입구에서부터 캔음료를 들고 달려오는 코디의 모습이 보였다. 주기락의 푸른 눈에 불온한 기가 감돌고 입술 끝이 나른히 올라갔다. 노리는 사냥감을 찾은 맹수 같은 미소였다.
주기락의 일주년 기념 콘서를 하는 공연장 입구는 공연 시작 30분 전에 개방되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한 팬들로 긴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공연 스태프는 콘서트 예매표를 보이는 팬에게 좌석을 안내하고는 손목에 주기락의 신곡 이름이 적힌 홀로그램 팔찌를 채웠다. 일 층과 이 층으로 된 삼만 석의 자리는 금새 들어온 팬들로 빼곡해졌다. 한 시간 전에 최종 리허설을 마친 주기락은 대기실에서 분장을 하고 있었다. 격하게 움직여도 뻗친 금발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헤어 스프레이를 잔뜩 뿌렸다. 리사 원장의 샵에서 출장 나온 스타일리스트는 머리 손질을 끝내고 나서 주기락의 얼굴에 파우더를 꼼꼼히 펴발랐다. 조명이 쏟아지는 어두운 공연장에서도 주기락의 눈매가 선명하게 보일 만큼 검은색 아이브로우로 눈꼬리를 길게 그리고, 컨실러와 하이라이터로 뺨에 생기를 주었다. 하얀 쇄골에는 은색 펄이 들어간 팩트를 발라 고혹적인 포인트도 강조했다. 스타일링이 무사히 끝나 물 한 병 마실 만큼의 대기 시간을 가진 후 무대에서 일 주년 기념 영상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보는 팬들의 함성 소리도 커졌다. 그 소리가 주기락의 긴장과 흥분을 돋웠다. 최종 리허설까지도 차분히 식어있던 피가 천천히 끓었다. 무대 경험을 수없이 쌓아도 이 감정만은 뜻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천상 가수였다. 긴장 때문에 여유가 조금 사라져 찬물로 목을 한 번 축이고 일어난다. 무대 의상인 하얀 티셔츠와 가죽 재킷을 입은 주기락은 귀에 인이어를 고정했다. 완벽한 그의 모습에 가수 주기락을 바라보는 B.S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저절로 입가가 풀렸다.
“기락 씨~ 멋져요!”
“오늘 컨디션도 최고고, 정말 좋아!”
“파이팅, 기락 씨!”
“날 보러와 준 팬들이 저렇게 많은데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해야죠.”
“그래, 기락아. 콘서트 끝나면 너 좋아하는 것 다 사줄게.”
“약속한 거다, 형?”
“내가 언제 빈말하디? 걱정말고 다녀와, 주기락!”
매니저 임우영은 주기락의 어깨를 툭 치고 나서 물러났다. 주기락은 매니저에게 활짝 웃으며 V 사인을 해주고는 공연장 무대 뒤편의 큰 가림막에 섰다. 이 층에 올라간 스태프와 연결된 무전기를 든 스태프가 일 초마다 손가락을 폈다. 다섯 번 신호를 받은 주기락은 관객이 기다리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무대 위로 올라가자 귀를 찢는 환호성이 이어졌다. 하얀 조명이 그의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춤과 동시에 어둠 속에 있던 브라스와 밴드 팀도 드러났다. 전자 드럼 소리가 탁 신호를 울리며 주기락이 낸 신곡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주기락은 손을 들어올려 공연장에 모인 팬들과 닿는 듯한 퍼포먼스를 했다. 천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연주 리듬을 따라 밟는 댄스 스텝이 유려했다. 강한 하드 댄스도 주기락이 추면 부드러운 느낌이 가미되어 색다른 해석을 낳았다. 수많은 팬 앞에서 여유가 흐르는 아름다운 미소를 보면 그가 긴장했던 모습은 연기로 비칠 정도였다. 통통 튀는 로맨틱한 멜로디의 전주를 끝낸 주기락은 환호하는 관중을 보며 전주 일부의 가사를 독백처럼 되뇌었다.
“그날 밤 우린 손 끝이 닿았지. 난 모른 척 했지만, 속으론 알고 있었어. 네가 내게 깊이 빠진 것을 말야. 그리고 난 고백의 편지와 키스 사이에서 고민하지. 네가 먼저 원하는 건 뭘까―”
도발적인 가사를 들은 주기락의 팬들은 키스를 연호했다. 형광 피켓과 야광봉의 물결이 주기락의 망막을 어지럽게 흔들었지만, 그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는 사랑 노래를 계속했다.
천천히 다가가는 내 모습을 그리고만 있지 마.
상상보다 더 아찔한 키스를 네게 줄게.
And how you gave that love to me.
주기락은 미소짓는 입술 위를 검지 손가락으로 닿았다 떼며 전에 없이 관능적인 분위기로 관중을 매혹했다. 그의 신곡 퍼포먼스를 콘서트에서 처음 접한 팬들은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주기락은 그들의 숨소리까지 훔쳐버릴 듯 달콤한 후렴을 불렀다. 뺨에 달린 소형 마이크는 주기락의 미성을 관객석의 스피커까지 선명히 전했다.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징 울리면서 노래가 끝나자 환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주기락을 목청 터질 듯 부르는 소리가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주기락은 호응에 답해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Kilo 주기락의 콘서트에 와주셔서 고마워요. 연모 시의 여러분에게 인사드릴게요. 주기락입니다!”
“우리도 반가워요!”
“이렇게 콘서트에 와주신 팬분들을 위해서 두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저를 보여 줄게요! 즐길 준비 되셨죠?”
“네!”
“그럼 키보드 소리를 듣고 다음 곡을 맞춰 봐요!”
주기락이 밴드를 돌아보자 키보드 연주자가 웃으며 건반을 눌렀다. 그의 연주 소리에 바로 정답이 터져 나왔다.
“꺅! 별들의 고백이야!”
주기락은 스태프가 전해준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의자에 앉아 현을 퉁겼다. 그의 진심을 담은 잔잔한 발라드는 어쿠스틱 기타 소리만 입혀져 맑은 소리가 되었다. 다른 반주는 관객이 따라 부르는 소리였다.
나만의 사랑, 빛나는 너.
영원히 변치 않아.
지금 나는 온 세상에 외치고 싶어.
사랑해. I love you.
너만을.
기타를 치는 주기락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 곰인형, 살이 찢길 듯 아픈데도 눈을 찡그리면서 웃는 어린 얼굴. 그 아이도 이 콘서트홀 안에서 노래를 듣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는 더 마음을 담아 노래했다. 주기락의 어두운 추억을 모르는 팬들은 그저 아름다운 멜로디를 따라 부를 뿐이었다. 가수 주기락의 이면에 무감정한 인격이 숨어 있는걸 모르니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준비된, 또 들키고 싶지 않은 블랙 스완 조직원의 모습이다. 주기락은 세 곡을 더 부르고 나서 2부를 위해 대기실로 내려갔다. 연모 시에서 유명한 가수가 게스트로 섭외되어 히트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연을 지켜보던 매니저는 달려 내려오는 주기락을 채근했다.
“기락아, 시간 없어! 빨리!”
“알았어, 형. 서두르자.”
대기하던 코디는 주기락의 의상을 들고 번개처럼 달려왔고, 그는 피팅룸에서 다음 의상을 서둘러 갈아 입었다. 주기락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출장 스타일리스트 두 명이 달라 붙었다. 헤어 스프레이와 헤어핀을 들고 머리를 손질하는 손이 분주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B.S 엔터테인먼트와 주기락의 특별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시간날 때마다 연습한 스타일이지만, 막상 공연 당일이 되자 스타일리스트는 긴장으로 덜덜 떨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손에 힘 빼고 해요.”
“마음은 긴장 안 하고 싶은데! 팬들이 기다리는 컨셉이라 긴장이 자꾸 돼요.”
“잘 할 수 있어요. 연습 많이 했으니까.”
스타일리스트가 멋쩍게 웃자 주기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토닥였다. 스타일리스트는 그의 응원에 수긍하며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수도 없다. ‘만약 욕 들어 먹으면 사과 인터뷰 기사 내고 샵을 나가야지…’ 하는 각오로 임했다. 스타일리스트 두 명이 삼십 분 동안 혼신의 힘으로 완성해낸 최종 컨셉을 본 제작사 직원들은 저마다 입을 떡 벌리고 감상하느라 바빴다. 코디는 주기락의 스타일을 보고는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자, 스탠바이!”
공연장 스태프가 내려와 2부 시작을 알렸다. 임우영은 그 소리에 멍해진 정신을 수습하며 박수를 짝 다.
“좋아, 완벽해. 가자!”
새 분장 때문에 소형 마이크와 인이어를 얼굴에서 뺀 주기락은 무선 마이크를 챙겼다. 이번엔 무대 가림막 뒤가 아니라 무대 플로우 아래쪽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게스트의 공연과 인터벌 타임이 끝난 후 언제 주기락이 나올까 기다리던 팬들은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중앙의 플로우가 쑥 꺼지자 수군거림을 멈췄다. 그리고 오분 후 한 남자를 실은 플로우가 천천히 올라왔다. 환한 조명이 무대 중앙을 일제히 동그랗게 비추었다.
“누구야? 주기락 아냐…?”
고개 숙인 남자는 조명을 비추는 효과음이 팟 울리자 얼굴을 들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관객은 놀라움에 물든 비명을 질렀다. 무대 뒤편의 LED 화면에 「사랑의 유혹에 빠진 천사」라는 문장이 떴다. 컨셉 투표에서 천사가 월등한 표차로 이긴 것이었다. 주기락은 새까만 머리를 리젠트 스타일로 넘기고, 왼쪽 눈과 뺨 위를 가로지르는 수선화 형상의 검은 타투를 발랐다. 아이라인을 길게 잡은 눈꼬리 옆에는 붉은 섀도우를 늘려 바르고, 아랫입술 가운데에만 장밋빛 립글로즈를 발랐다. 맨몸에 입은 검은 롱 트렌치 코트와 검은 스키니 바지, 그리고 손목에 감긴 끊어진 사슬과 하얗게 드러난 맨발. 주기락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숨을 멎게 하는 듯한 파격 변신에 팬들은 늦게 환호했다. 그 환호 소리가 조용해지고 나서 주기락은 마이크를 들었다. 그 곡이 이번 콘서트의 시크릿 넘버였다. Paradise lost라는 곡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나야
네 이름을 불렀지 하지만 대답은 없었어
너는 이미 다른 남자의 연인이었으니까
널 빼앗아 올까, 널 빼앗길까
사랑을 얻은 악마로 남을지
사랑을 잃은 천사로 남을지 많이 생각했었어
탐욕으로 시작된 사랑은 멈추지 않아
오직 너만이 내 기로를 정할 수 있어
너는 어떤 나를 원해?
나는 바로 지금 네 앞에 서 있어
바로 여기,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Paradise lost
주기락은 눈을 감고 노래하면서 이미지로 그려지는 황폐한 장소를 보았다. 잿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재와 말라 쩍쩍 갈라진 땅. 썩은 먹이를 찾아 비행하는 새의 역한 냄새가 풍기는, 종말이 가까워지는 곳에 어떤 이가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을 잡은 주기락은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그건 마음속에 뿌리를 튼 부정을 물리치는 빛이었다. 생기를 잃은 역한 땅이라도 그녀의 환상과 함께 하는 곳은 낙원이다. 그렇게 주기락은 늘 홀로 구원받았다. 상념을 걷고 눈을 뜨니, 현란하게 흔들리는 야광봉의 물결과 첫 공개한 노래를 어설피 따라 부르는 소리가 주기락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벨트 매듭을 허술히 묶은 트렌치코트가 펼쳐져 주기락의 움직임을 따라 한들거렸다. 그의 탄탄한 복근과 가슴이 코트 깃 사이로 드러나자 꺅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름다운 검은 천사의 모습으로 히트곡 여러 곡을 열창한 주기락은 숨을 골랐다.
“아쉽게도 여러분과 또 이별할 시간이 왔네요.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콘서트 열리면 또 와주실 거죠?”
주기락이 섭섭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운을 떼자 관객석에서 네, 하고 아쉬워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속으로 앵콜 곡을 생각한 주기락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무대 뒤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팬들은 쉼 없이 앵콜을 외쳤다. 주기락의 이름과 앵콜을 외치는 소리가 무대 뒤까지 메아리처럼 진동했다. B.S 엔터 직원들은 대기실 안에서 마무리 준비를 하고 있었고, 혼자 무대 가림막 뒤에서 기다리던 코디를 본 주기락은 활짝 웃었다.
“코디님,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우리 저리로 갈까요?”
주기락은 코디에게 인적이 닿지 않는 무대 계단을 가리켰다. 조명도 꺼진 으슥한 곳이었다. 코디는 잠시 망설였지만 웃는 낯의 주기락에게 홀린 듯 발을 움직였다.
“기락 씨, 무슨 일인데요?”
주기락을 따라가며 물은 코디는 계단 앞에 섰다. 주기락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미소를 싸늘히 지웠다. 그의 눈 속 푸른 빛에 서늘함이 깃들었다. 그는 갑자기 단단한 손을 들어 무방비한 코디의 목을 움켜잡았다. 주기락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콘서트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한 주기락이 아닌 남자가 코디였던 여자를 비웃고 있었다.
“헉! 기락 씨… 왜…”
“난 누구지?”
코디는 주기락의 서늘한 황금색 눈동자를 들여다 본 순간 몸이 마비된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동공이 흐릿해지며 유일한 사고는 주기락의 물음으로만 흘러나왔다.
“블랙… 스완…의 유일한 성공 실험체 3684…”
“네가 잠입한 목적은?”
“당신의 감시와… 이볼 실험의 관찰입니다.”
힘껏 목이 졸린 여자는 주기락의 숨은 능력 암시에 명받은 바를 모두 털어 놓았다. 블랙 스완의 말단 조직원일 뿐인 여자는 저보다 상위인 Evol 능력에 눌려 마리오넷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대답을 들은 주기락은 목을 틀어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시시하군.”
그녀가 접근한 이유를 잘 알고도 물은 주기락은 제 손으로 한계까지 목이 졸리는 여자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사고를 빼앗겨 저항하는 몸짓없이 교살을 눈앞에 둔 여자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주기락을 마주 보았다. 허공에서 달랑거리던 발이 축 늘어지는 순간 주기락은 손을 놓았다. 막 숨을 거둔 시신이 계단 위로 풀썩 떨어졌다. 눈을 흡 뜨고 죽은 여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거슬리는 벌레를 밟아 죽인 것 마냥 냉담했다. 그녀가 불순한 명령을 받아 접근했음을 진즉부터 간파하고는 블랙 스완의 기밀 파일을 해킹했다. 그건 동류로서의 직감이었다. 그래서 더욱 눈에 거슬려 제거하고 싶었다. 죽은 여자의 뱀같은 눈빛이 그녀를 본다고 생각하면 끔찍했으니까. 주기락은 이제 이용 가치가 없어진 제 코디, 코드네임 RESA2097가 이상 이볼 행동을 보여 죽였다고 블랙 스완에 보고하기로 했다. 눈빛의 금색 예기를 지운 주기락은 주검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어 앵콜을 끈질기게 외치는 관객석의 열기를 느꼈다. 보잘 것 없는 존재의 죽음을 다른 세계에서 울리는 환호 소리가 덮었다. 죽은 여자도, 주기락도 그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주기락은 여자의 크로스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블랙 스완에 시신을 치우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아마 이 공연장 어디엔가 감시하고 있는 조직원이 메시지를 받고 달려올 것이다. 주기락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마이크를 잡아 들고 무대 위로 천천히 올랐다. 그는 거짓 낙원에 뜬 잿빛 태양을 연기하기 위해 춤을 추고, 노래했다. 그의 진실한 마음을 담은 노래는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한 소녀를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