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행세계: 당신을 사랑합니다.
허묵 × 유연
프레그랑 & 許墨(@Honey_Trap_Fox_)
타일에 금속이 구르는 소리가 깊은 정적에 균열을 내었다. 발치에 제 필기구를 떨어뜨린 남자는 그조차 모르는지 미동도 않고 그저 제가 닫은 현관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출 것처럼 그는 초점이 멀어진 눈을 하고 애써 웃었다. 입꼬리는 금세 올라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굳었다. 무심한 초침이 하루를 갈랐다.
"교수님? 허묵 교수님. 왜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서 있어요. 자, 어서 와서 차 한 잔 하세요. 이제 가을 날씨라서 오늘은 따뜻한 걸로 준비했으니 어서요."
가냘프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남자의 귓전에서 맴돈다. 남자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평생 마음에 담은 단 한 사람이 하는 말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요 유연씨. 오늘은 내가 쿠키를 좀 사 왔으니 우리, 차랑 같이 먹을까요?"
미소지으며 기어이 입 밖으로 내어놓은 말들은 이내 허무하게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남자는 다탁도, 따스한 찻물도, 쿠키도 없이 휑덩그렁한 거실에 나동그라지듯 몸을 부렸다. 오늘은, 남자에게도 지나치게 피곤한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 속에 고른 숨소리가 울렸다. 작은 숨결은 차마 남자의 곁을 쉬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다 사그라들어 공기에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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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허묵은 드물게 과거를 보았다. 몽중에도 여기가 꿈이고 과거임을 알 수 있는 건 시야에 색채가 찬란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색채를 준 유일한 인물, 유연이 있던 세계.
허묵은 기쁘고도 쓸쓸한 기분으로 꿈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를 살게 하는 이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명백한 허상 속으로. 내딛는 걸음마저 사라지는 공간이 곧 그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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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사랑해요 유연씨. 당신이 있어서 내가 살아요."
내가, 유연씨 생전에 이런 말을 했던가? 젊은 뇌과학자는 꿈속에서조차 의심을 놓을 수 없었다. 채 벗지 못한 예복이 몸을 옥죄었다. 기어이 등꽃이 흐드러진 장소를 찾아내 마련한 식장에, 짙은 녹음의 향이 깔렸다. 나무껍질에서 날 법한 흙내가 여린 등꽃 향기를 덮어, 이르게도 여름 분위기를 풍겼다. 남자는 여자를 잡아먹고 싶은 욕심을 꾹꾹 눌러, 동그란 이마에 작은 순흔을 남기고 떨어졌다. 입술에 남은 온기며 촉감이 달큰하게 혀끝에 녹았다. 남자는 공연히 허기가 지는 것 같아 일삼아 제 옆에 선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제게로 옮겨 와도 여전히 달고 위험할 단 하나를 놓칠까 봐 겁이 났다. 좌중은 그 모습에 부부의 금슬을 점쳤다.
"당신에게서 등꽃 향기가 나요. 오늘따라 이 향, 너무 맛있네요."
"정말로 이렇게 예쁜 군락지를 찾아내실 줄은 몰랐어요. 내 남편 될 사람이라서 그런가? 내게는 당신이 꽃으로 보여요 교수님."
"그래요? 내가 있는데 꽃 타령이라니. 오늘 밤은, 당신 방에 꽃을 놓고 물러나면 되나요, 나의 사랑스런 부인."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허묵은 유연의 허리를 감싸안은 반대쪽 손에 살며시 쥐었던 등꽃을 으스러뜨리고 말았다. 등꽃 향기가 녹음의 향을 덮었다. 온통 유연의 향이었다. 저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향이 공기 중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풍경을 완성하는 건 당신이에요, 교수님. 도망갈 생각은 말아요."
유연이 허묵의 목에 두 팔을 걸었다.
"교수님 말고, 허묵. 이름으로 불러 줘요. 당신 앞에서 내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모두 빛을 잃는다는 걸 이미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허묵은 유연의 어깨에 깊이 입을 맞추며 가능한 한 가장 야살스러운 목소리를 내어 간청했다.
"허묵씨. 곁에 있어 줘요."
귀엽게도 제가 요구하는 말을 즉시 뱉어 내는 작은 신부의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그는 즐겁게 지켜보았다. 이래서 나는 당신을 떠나기 싫었어, 허묵은 질척한 속내를 가까스로 삼키고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하고 다정한 말만을 내뱉었다.
"물론, 당신이 나를 무서워하거나 꺼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나는 갖다 바칠 자신이 있어요."
이 말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이었다.
유연은 그 말에 꽃처럼 웃었다. 그리고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드러낸다는 듯이 허묵의 귀에 대고 숨소리처럼 속삭였다.
"사랑해요."
가장 듣고 싶던 한마디를 들었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역시 내가 못난 놈이기 때문이겠지. 저열한 욕심을 부드러운 표정에 숨기고 신랑은 다시 제 아름다운 신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아직 유연이 말을 맺지 못했음을 알아도 도저히 채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가슴 안쪽의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얼마만큼?"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이요."
그 순간, 허묵은 저를 팽팽히 잡아매고 있던 끈 하나가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제 여인이 말을 맺자마자 입술에 달려들어 가차없이 숨을 앗았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유연의 여린 입 안을 제멋대로 유린했다. 전에 없이 날카롭고 권위적인 키스였다. 좌중은 모두 볼을 붉힌 채 숨을 죽였다.
짧은 시간 침탈을 만족스레 끝낸 약탈자가 마침내 희생양에게서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것 같은 정적 속에, 제 연정을 주인께 고해바치는 목소리만이 홀로 달았다.
"나의 단조로운 세상에 당신이 유일한 색이라는 걸, 당신은 좀 알아 줘야 해요. 사랑하는 내 신부님."
보랏빛 향기가 두 사람 주위로 조용히 내려앉은 어느 초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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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보러 왔어요, 유연씨."
다시 늦은 밤, 허묵 생명과학 연구소의 깊은 보안구역 생명유지 장치 앞에서 연구소의 주인은 웃어 보였다. 철저히 외인을 통제해 오직 저밖에 드나드는 자가 없음에도 냉랭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그는 생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눈을 감은 여인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나 무모한 짓을 했죠. 말해 봐요. 내가 분명 살아남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은데, 왜 매번 이렇게 몸 사릴 줄을 몰라요."
저를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확신한 남자는 그제야 분통을 터뜨렸다.
"……속상하게."
마지막 말은 남자 자신에게도 겨우 들릴 중얼거림이었다.
'울지 말아요. 내가 당신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는 걸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유연으로서는 그저 허묵에게 닿기를 바라며 온몸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남자는 끝내 그 처절한 외침을 듣지 못하고 곧 방을 나섰다. 다시 특유의 냉랭한 웃음을 갑옷처럼 두른 채였다.
내가 반드시 당신을, 까지 생각하던 유연은 다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남자는 주기적으로 보안구역에 드나들었다. 아니, 실은 시도때도 없이 시간이 날 때마다 들렀다. 어느 날은 소리가 새지 못하도록 이중삼중의 방음장치를 가동하고 통곡을 하고 갔고, 어느 날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미동은커녕 표정조차 띠지 않는 여인에게 뜨거운 연정을 토로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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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금속이 제 가슴을 뜨겁게 가르는 감촉을 소름 끼치리만치 생생히 느끼던 유연은 곧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요 며칠 그는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으므로, 격렬한 아픔이 의식과 함께 멀어지는 것이 기껍기까지 했다. 저쪽의 퀸을 제거한다면 적어도 몰살은 막을 수 있었겠지, 그것이 그 사건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잠은 길고 깊었다.
감히 무엇도 침범하지 못할 공간에, 외부의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귀에 거슬리게 웅웅거리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뒹굴다가 그 소리가 그립고 포근한 음색을 띠자 그것이 못내 궁금하였다. 소리는 듣고자 할수록 분명한 음가를 띠었다. 절대적이고 따스한 고독 속에서 마침내 그는 드문드문 들려온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유연, 사랑해. 보고 싶어요."
그러나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한 것은 다시 한참 뒤의 일이었다.
유연, 유연은 누구의 이름이지? 사랑,이, 뭐지? 왜 보고 싶지? 나는 저 소리를 왜 들어야 하지?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입속을 떠도는 문장을 유려한 어조로 그대로 읊는 목소리가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는 공연히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누가, 왜 저렇게 애절한 목소리로 떠드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리를 외면하려고 다시 잠을 청한 어느 날, 그는 꿈에서 그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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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은 몸을 움직여 기물과 제 신체가 부딛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제가 또 꿈으로 남을 훔쳐보게 되었음을 알았다.
가장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허묵은 홀로 앉아 빠르게 변화하는 데이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유연이 알던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틀림없는 허묵이었다. 유연은 데이터를 흘끗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1996년 2월 21일 연모시에서 출생. 유연(悠然), 코드네임 퀸.
2000년 5월 24일에 파라다이스 복지원에서 이볼 활성화 실험을 받기 시작해 10월 30일에 탈출. 이후 煎 NW 멤버 유경원(悠瓊原) 씨 슬하에서 성장하여 2018년 6월 TBS 기적의 발견 프로듀서 역임. 연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데이터는 간단한 신상 명세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시시콜콜한 것까지 유연에 관한 것을 모두 까발리고 있었다. 코드네임 아레스의 권한으로 조직에서 빼내온 자료를 눈으로 훑으며 허묵은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나 화가 났는지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유연은 짐작만 했던 자료가 실존했던 데다 다른 이도 아니고 허묵이 그걸 쥐고 있다는 것에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허묵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접근했는지도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꿈 주인의 감정과 생각을 모두 들여다보기로 했다.
처음,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소년은 풍문으로 들은 작은 왕을 실제로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2001년 7월 15일 오후 5시 30분, 연모시 외곽 남산 꼭대기에서 퀸과 아레스 조우
언제나처럼 묵인된 일탈이었다. 온갖 감각을 빼앗긴 소년은 오로지 제게 익숙한 동산에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주위에 나무보다, 풀보다 많은 것이 저를 감시하는 인원이었으나, 소년이 동산에 가기를 고집하면 그들도 적당히 경계를 풀어 주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날이었다. 소년이 조직에 몸을 의탁한 이래 처음으로, 소년의 주변에 누구의 기척도 남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벼운 해방감에 소년의 마음이 술렁였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조금 버티기 쉬운 하루일까.'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걷는 걸음엔 설렘이 실려 있었다.
항상 가던 그늘막에 당도하기도 전에 무지갯빛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소년의 박동이 빨라졌다. 기억하는 삶에서 처음으로 그는 저보다 어린 생명에게 귀여움을 느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소년은 소녀의 이름을 물었다. 悠然. 소년은 절망했다. 훗날 자신이 죽음으로 이끌어야 할지도 모를 이름이었다.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빌었다. 그 밤이 새도록.
2009년 9월 1일, 유연 연모중학교 입학.
이후 소년의 관심사는 EVOL에 집중되었다. 찬란했던 소녀가 그대로 천진하게 자라길 바라서였다. 소년의 머리가 클수록 그에게 딸리는 권한 또한 많아졌다. 그가 파라다이스 복지원에 대해 알게 된 건 열 살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그는 다시 悠然이라는 이름을 보고도 무덤덤한 척할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했다. 이상한 상실감이 소년을 덮쳤다.
2011년 10월, "기적의 발견" 기획부 인턴으로 실습 시작.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견학한 팀이므로 서류처리만 완료.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정처없이 국외를 떠돌면서 어쩌다 남들이 감탄하는 풍경을 볼 때엔 어김없이 어린 날의 소녀를 생각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정제된 흑백뿐이었음에도, 끝끝내 그러했다. 유연은 조직의 오랜 목표에 깊게 얽힌 인물이었으므로 성장과정 하나하나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세월과 계절이 감에 따라 청년의 서랍에는 연인을 향한 선물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을 물건이 그득히 들어찼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청년은 모국으로, 연모시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순간순간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2014년 3월 26일, 주목할 만한 신인 다큐감독 100인에 선정. 작품명 < 달빛의 뒷면을 들추다>
때때로 청년은 그날의 소녀가 성장한 모습을 보고받았다. 말갛게 웃고 있는 모습이 찬란해서, 여전히 그 모습만은 화려하고 선명한 천연색이라서 그는 어느 밤에 울었고, 어느 새벽엔 웃었다. 청년은 그러나 이미 그 무렵 무표정에 광기조차 감출 줄 알게 되었다. 하여 누구도 그가 표출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청년은 이미 냉혹한 전장의 신이 되었다.
2016년 8월 9일, 보호자 유경원(悠瓊原) 사망.
2016년 9월 27일, 유연프로덕션 대표직 취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국으로 돌아온 어느 아침, 청년은 조직의 끄나풀이자 제 선배 연구자인 장씨의 입에서 제가 아프게 아끼던 이름을 들었다. 다시, 悠然이었다. 교활함을 감출 줄 몰라 비열함마저 흘리고 다니는 늙은 너구리의 속내야 빤한 것이었으나 그는 일단 제 소녀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10여 년을 엇갈린 인연이었으나, 차마 그 자신조차 이유를 모른 채로 자르지 못한 사람이었다. 공연히, 속이 울렁거렸다.
"허교수는 왜요?"
청년은 그 날 이후 따로이 소녀의 근황을 수집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이번에는 근황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수집하고 싶어졌다. 당신은 정말로 그새 나를 잊어버렸나. 모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어도 그 얼굴엔 지인을 만났다는 반가움만큼은 떠오르지 않아, 청년은 조금 심통이 났다. 처음부터 그는 소녀의 것이었으나, 소녀는 제게 무엇도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응당 서러울 일이었다. 청년은 조심스레 제 마음을 감추었다.
어렸던 10여 년을 감추고 그날 첫눈에 반한 것처럼 연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도 않았지만 어려울 것도 아니었다.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 희망사항을 이야기하면 소녀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따라왔다. 일부러 제가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 덫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씩씩하게 밟으며 다가오는 소녀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더는 움직일 수 없도록 탄탄히 옭아매어, 독점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게 되었지만, 또한 제 작은 소녀는 그를 원치 않으므로 사랑의 이름으로 인내해야만 했다.
유연의 마음을 얻는 것은 시행착오가 좀 있긴 해도 대체로 성취감이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유연에게 경각심을 심는 것은 몹시 어려웠다. 다른 무엇보다, 쥔 것을 놓기가 몹시 어려워 허묵은 많은 밤을 앓았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모순이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인격인 뇌과학자 허묵보다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아레스 쪽에 제 명예와 재산이 더 많이 걸려 있음에도, 그는 허묵에게 떨어진 작은 위안을 선택하고 싶었다. 종국에 그 위안을 제 손으로 짓이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도무지 어쩔 수 없었다.
호기심은 제 몸을 불려 호감이 되었다가, 또 피흘리며 찢어져 소유욕이 되었다. 소유욕은 지독한 풍화를 거치고 나서야 온전히 사랑이 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사랑이었다.
청년은 소녀의 마음을 언제나 조금 더 원했다. 나를 잠깐만 더 돌아봐 줘. 그가 늘상 마음으로 외치는 말이었다. 충족될 리 없는 욕심이었다. 욱신, 유연은 제 것도 청년의 것도 아닌 통증에 움찔했다.
여기까지 긴 상념을 마치고, 이제는 애티를 모두 벗어 청년이라기도 어색한 허묵은 개운한 얼굴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지금껏 보답받지 못한 애정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관계를 다시 쌓아가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결심을 굳힌 허묵이 데이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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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완료.
유연은 거기까지 보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소름끼치도록 정성스러운 그 애정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당신은 또다시 도망치는구나. 허묵은 잠시 쓰게 웃고는 유연의 남은 잠자리가 편안하길 빌었다. 언젠가는 저 안쓰러운 아가씨를 끌어안아도 되는 날이 오기만 바랐다. 먹은 것도 없이 속이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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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아이들이로구나.”
한바탕 소란했던 보안구역에 정적이 내려앉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흘러넘치는 남의 감정에 마비된 머리가 분노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당신, 어떻게?”
당신을 죽여 내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유연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유연에게서 피어오르는 살심을 거두어 갈무리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만일 유연에게 자애로운 어머니가 있었다면 필시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련한 내 아이야, 내가 너고 네가 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니.”
여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유연에겐 그 모습이 가장 큰 기만임을 알면서도.
“나는 이제 쉬어야겠으니, 지금은 저리 가요.”
이제 유연은 요란하게 저를 그리는 남자보다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난 여인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생시의 기억을 거의 잊어버렸어도 저를 죽음으로 밀어넣은 상황까지 잊을 만큼 유연의 비위가 좋지는 못하였으므로, 유연은 여인을 제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피곤한 건 알아. 그렇지만 지금 너를 쉬게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왔단다.”
여인은 걷는 것 같지도 않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유연의 곁으로 다가서서는 유연을 품으로 끌어안으려 했다.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유연은 그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악에 받친 목소리를 백색 공간이 흡수했다.
“당신도 봤잖아요. 나를 배신하고, 죽이려 했던 조직의 수장이 가증스럽게도…….”
그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려는 것을 보고 여인은 유연을 안으려던 손을 들어 그 눈을 가렸다.
“너를 사랑하는 것 말이니?”
여인의 손바닥에 습한 열기가 고였다가 물기가 되었다.
“지금은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목소리가 까끌하게 갈라졌다. 가까스로 말을 맺은 유연은 끝내 여인을 뿌리치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너는 아직 그를 잊지 못했지. 내 말이 틀렸니?”
여인은 제 사랑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서로 앙금을 품고서 괴로워하는 것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저 사람을 사랑한 것이 내가 아버지를 잃고 나서 한 일 중 가장 큰 실수예요.”
수습하지 못한 흐느낌이 그예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여인은 유연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아버지, 소리에 두 사람 모두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그를 사랑하니?”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유연을 달래던 여인이었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지금은 모르겠어요.”
유연은 이제 제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사랑한 사람은, 네게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제 여인은 순수하게 그것이 궁금했다. 퀸의 권능을 지니고 오랜 세월을 떠돌며 세속의 감정을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제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이상하게 눈에 걸리고 마음이 쓰였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필요할 때에 옆에 있어 주고…….”
연인이라면 당연한 매너가 이 아이에게는 특별했을까. 퀸은 오로지 그것이 안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유연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전부였을까?”
이제 퀸은 숫제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음성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연은 퀸의 질문을 듣고서야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퀸조차 자기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 잊었을 때쯤, 유연은 입을 열었다.
“비밀이 많은 남자라는 건 처음 만날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말하며 유연은 다시 무릎으로 얼굴을 묻었다. 말소리는 천에 걸려 뭉그러졌다.
“그 비밀이 너를 해쳤다고 생각하니?”
이번에야말로 퀸은 유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기는 없으나 자애로운 손이었다.
“결국, 그렇지 않나요? 그보다 당신, 왜 나에게 자꾸 이런 걸 묻는 건가요. 당신이 원했던 대로 세계를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퀸, 당신이 당신의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던 것처럼 나도 내 세상을 유지하길 원했어요.”
유연은 당연한 것을 새삼 묻는 퀸에게도, 지난 일을 다시 헤집어 아픈 제 마음에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자신이 퀸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이볼버가 된 것도 무엇 하나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없었다. 다른 이볼버와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해 이볼을 익혔을 뿐,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을 엄혹한 선택으로 내모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내 아이야, 그건…….”
자기가 예전에 했던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는 가련한 아이를 보는 퀸의 시선은 변함없이 따스했다.
“오해라고 말할 셈이라면 입 다물고 꺼져요. 그놈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거잖아요. 당신은 모든 걸 보고 있었다면서 내 앞에서 누구를 옹호할 생각인가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탓에 유연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옷감 표면에 다시 젖은 얼룩이 생기는 것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대들 요량으로 차가운 분노를 뿜어내던 유연은 복받쳐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하소연으로 말을 맺었다. 억울함이 눈자위에 고였다가 옷감으로 떨어졌다.
“그래, 지금은 좀 쉬렴. 언젠가 때가 되면 네게 진실을 보여 주어야겠구나.”
퀸은 힘이 빠져 씩씩거리는 유연을 달래 한쪽에 누이고 곧 자신도 그 몸으로 들어가 누웠다.
다시, 냉랭한 정적이었다. 안온한 어둠이 산란하는 빛을 덮었다.
-
가여운 내 아이야.
여자는 따스한 어둠 속에서 저와 닮은 아이를 생각했다. 생각은 익숙한 날붙이의 촉감이 가슴을 가르던 그 날, 제가 왜 변덕을 부렸는가에 이르렀다.
여자에게도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아이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의, 안나연, 유영, 고은, 이택언, 허묵, 백기, 주기락…….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퀸의 권능을 휘두르는 것만은 막아야 해요. 자신의 몸을 가른 남자는 그런 말을 했었다. 나의 견고한 세계를 당신이 허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노라고.
“내 앞에서는 천천히 성장해도 돼요.”
나는, 당신이 결국 각성할 걸 알지만 그 전에 당신을 독점하고 싶어요. 당신이 훌쩍 커서 저 멀리로 가 버리는 게 너무 무서우니까, 함께 있어 줘요. 10년이든 20년이든.
“네 신분이 어떻든, 그 어깨에 짐을 모두 짊어지려 들지 마.”
나는, 네가 평범하고 약할지언정 가장 밝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물면 좋겠어. 내가 지킬 수 있는 범위에 머물러 줘. 내가 너와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너니까…….
“내가 꼭 당신을 보호할 거예요.”
당신에게 버거운 운명이라면 그 궤도는 내가 바꾸겠어요. 그러니, 지금부터 명령합니다. 나쁘고 더러운 모습은 모두 나에게 주고, 당신은 가장 멋진 슈퍼 히어로의 모습만 가져가세요.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퀸을 부정했다. 어렵게 세운 사명을 가장 가까운 사람이는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세계를 지키려고 했는데…….
퀸은 거기서 일부러 생각을 끊었다. 그러나 그 머릿속을 침범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세계는 내 손으로 지켜 보이겠어요.”
안온한 어둠 속에 차가운 빛의 파편이 명멸했다.
“그렇지만 아이야,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란다. 나는 네가 내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온갖 인간군상이 모여든 대피소에서 유연이 고작 저 하나를 죽이겠다고 값없이 제 목숨조차 버렸을 때, 퀸은 찰나의 순간 그 세계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을 느꼈다. 얼어붙은 거리로 공허한 피아노가 울리는, 억눌린 평화가 아름다운 항동의 도시. 퀸이 사랑하는 유연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시련일 터였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암흑을 자애로운 밤의 여왕이 지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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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일렁였다. 잠깐, 끝없는 어둠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어 유연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아주 익숙한 공간, 그리운 향기가 몸을 감싸안았다. 기억보다 앳되어 보이는 허묵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입는 실험복에 부드러운 인상인 것은 같았으나, 그는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서 있었다.
"당신에게 블랙 스완이 확보하지 못한 EVOL 이식 수술 방법을 드릴 테니 연구 재료로……."
그는 상대방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표정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짜증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내 소중한 여왕을 겨우 네까짓 놈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곧, 학살이었다. 괴한들은 처음 몇 번은 허묵에게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쏟아지는 무자비한 공격을 피하기에도 급급해졌다. 묵직한 타격음과 핏방울이 잠깐 튀었다. 다시 옷섶 하나조차 흐트리지 않은 허묵은 어둠으로 사라지고, 유연의 시야 또한 암전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은 유연으로서는 처음 보는 널찍하고 권위적인 공간이었다. 불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데도 어딘가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에서 여러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보였다.
"리턴 투 제로라, 하데스, 자신 있나? 지금 퀸을 건드리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못 돼."
"모두들 알고 있다시피 퀸은 현재 각성이 임박한 상태입니다.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우리 쪽으로 끌어들인다면 계획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파라다이스 복지원, 그곳 책임자가 연모대에서 근무하는 장씨라지.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 회유에는 그를 파견하도록…….”
"아니, 내가 가지."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레스가 불쑥 나서자, 좌중은 잠시 술렁거렸다.
"하긴, 여자를 꾀어 내는 데에 아레스가 제격이기는 한데…….”
"그렇게 사소한 일을 하기에는 내 지위가 높다? 퀸은 중요 인물이자 희귀한 연구 재료 아니었나? 일을 확실하게 하려면 내가 가는 게 낫다."
"아레스라면 안심이지. 맡겨두겠네. 믿을 만한 성과를 보여 와 봐."
곧. 코드네임 퀸 본명 유연에 관한 자료 열람 권한 전부가 아레스에게 귀속되었다. 컴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시야는 점멸되었다.
이 꿈의 끝은 어디일까. 유연은 호기심과 불안으로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제 의지가 아님에도 남의 기억을 엿보는 일은 그에게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또다시 어둠의 힘이 유연의 시야를 가렸다.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성공할 수 없던 실험, 비정상적인 성공작……. 수식어 한번 화려하군."
"그래, 이번 목표는 뭐지? NW에서 퀸을 또 찾던가?"
"그쪽은 언제나 퀸을 갈망하지. 신(新)세계의 신(神)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 아닌가."
"저들이 먼저 퀸을 확보하면 일이 상당히 어려워지고 말아. 경계와 보안을 강화하도록 하지."
"가요. 다시는 내게 잡히지 말아요."
이상하게 그렇게 말하는 아레스의 눈동자는 간절한 걱정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시야는 빠르게 바뀌었다.
한쪽 눈을 거즈로 감싼 남자가 자료에 파묻혀 키보드를 두들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쩐지 신이 난 듯했고, 또 어찌 보면 설레는 듯도 해 보였다. 그의 손목에 조그만 매듭이 조용히 흔들렸다.
이번에 나타난 영상은 조금 흐릿해 보였다. 여남은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스케치북을 정리하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찢어진 페이지에 가 닿았다. 소년은 손을 들어 소녀가 자기 이름을 알려 준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기에 소녀에게 받은 종이학을 올렸다.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돌연 미풍이 불었다. 소년이 손바닥에 놓고서 한참 바라보던 작은 종이학은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소년은 폈던 손을 그대로 오므리고 오래오래 종이학이 날아간 방향을 응시하다가 해거름에야 그 자리를 떠나갔다.
유연은 소년이 사라지고 시야가 다시 암전되고 나서야 이번에 소년의 감정을 그대로 느꼈음을 깨달았다. 설렘과 그리움과 아쉬움이 밀려들어왔다.
이번에 유연을 이끈 것은 차갑고 축축한 어둠이었다. 끔찍하도록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공간에 도착했다.
싸구려 인조 가죽을 씌워 냉기만 겨우 막은 금속 침대에 유연 자신이 누운 장면이 보였다. 어쩐 일인지 유연은 문 밖에 누가 있는지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 꿈 속에 잠들어 있었다. 비로소 유연은 어느 아침 제가 그다지도 슬펐던 이유를 깨달았다. 사랑, 이었다.
유연을 억지로 꿈 속에 붙들어 둔 어둠의 힘은 그 순간 부드럽게 물러갔다. 다시, 순백의 공간이었다.
유연은 한동안 눈조차 깜박일 수 없었다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애도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