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無)인지 유(有)인지도 모를 공간에서 시간마저 잊고 숨죽이고 웅크려앉아 감정을 달래던 유연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어둠조차 침범하지 못한 휴식의 막간에, 다시 꿈이 찾아들었다.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줄래요?"
"내 소원은 신도 들어 줄 수 없지만,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그게, 뭔데요 교수님?"
"나를, 사랑해 줘요. 영원히 곁에 있어 주세요. 당신 옆이 당연히 내 자리라고 선언해 줘요. 10년 후에, 열 살을 더 먹은 당신과 함께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언제였더라, 분명히 맞닥뜨린 적이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때와 달리 지금 저 장면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 버렸다. 지금이라면 달리 말했을 텐데 하는 염원은 이런 식으로 쌓였다.
처음에는 표정 정도를 달리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엔 단어를, 다음에는 문장을, 그 다음에는 대화 전체를 의도한 대로 끌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운신과 발언을 모두 완벽하게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던 날에, 유연은 허묵의 꿈과 자신의 꿈을 연결했다.
"허묵 교수님, 아레스."
허묵은 이 때부터 위화감에 휩싸였다. 생시의 유연은 절대로 저를 이런 식으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유연, 당신."
대답하는 목소리는 그리움과 회한으로 심하게 떨렸다.
이승의 제약을 모두 초월할 수 있게 된 유연은 그 표정 변화를 보곤 그저 웃어 버렸다.
"당신을 어찌 부르더라도 당신은 당신이죠."
허묵이 유연에게 가장 갈망했던 말이었다.
"내 후회와 그리움이 당신을 여기까지 불러온 것인가요."
그러므로 그는 말로써 하는 확인이 필요했다. 사람의 행동 중 말이 가장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목소리로 확인해 주길 원했다.
"저 순정한 백색 공간에서 당신을 많이 생각했어요. 왜 저렇게 애달픈 목소리로 나를 찾을까, 저 사람에게 유연이 누구였을까."
유연은 사무적으로 그간의 곡절을 이야기했다. 허묵에게는 처음 보여 주는 냉정한 얼굴이었다. 다른 누가 아니라 허묵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를, 지키고 싶었나요? 아니면 이용하고 싶으셨어요?"
그 말이 허묵에게 비수가 되어 박혔다.
"유연, 내게 당신은 한 번도 수단인 적 없어요. 나는 항상 당신에게 진심이에요. 믿어 줄 수, 없겠나요?"
제 생시와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하는 허묵에게 유연은 오히려 위화감을 짙게 느꼈다. 그 생경한 감각 때문에 제 연인을 떠볼 수밖에 없겠노라고, 유연은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주워섬겼다.
"당신은 퀸과 협력하고 싶었지 유연을 사랑한 적은 없어요. 아닌가요? 2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당신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허묵은 지금의 유연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언급하려다 유연의 태도가 너무나 체념적이어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꿈인 것을 알고도 제멋대로 굴지 못한 적은, 단연코 지금이 처음이었다.
"유연, 내 작은 바보, 내 유일한 빛. 감히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훌쩍 커 버린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로 허묵은 유연을 달래기 시작했다.
"결국에 당신은 퀸의 사명을 받아들일 테니까 조금만 더 나만의 유연으로 남아 주길 원했어요. 당신의 옆자리를 독점할 수 없는 것도, 당신이 누구도 곁에 두지 못할 자리로 가 버리는 것도 나는, 무서워서……."
그러나 결국에 그 말들은 울음을 삼킨 하소연으로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제 연구소 깊숙이 모셔 둔 유연의 유해 앞에서는 잘도 흘리던 눈물이어도 어쩐지 지금 유연 앞에서는 무너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끝끝내 목이 메었다. 차마 달려가 유연을 안지도 못한 채로 그는 가만히 서서 속울음을 울었다.
그러나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시야가 이지러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진짜' 유연이 제 앞에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유연이 상당히 망설이고 있다는 것도 허묵은 느낄 수 있었다. 물러서야 할 때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마지막으로 억지를 한 번만 더 부려 보기로 결정했다.
"당신이 내 곁에 있을 때, 앞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마음을 전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닿고 싶어서, 당신이 문제에 부딛칠 때마다 나를 찾으면 좋겠다고 수도 없이 말했는데. 당신에게 끝없이 관여하고 연관되고 싶은 이 유치한 마음을, 이제 그만 받아 줄 수 없나요?"
허우대 멀쩡한 미남자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제게 애원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절경이었으나, 결국 이전과 똑같이 힘겨운 유추를 거쳐야 하는 답변을 받은 유연은 거기에 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유연이 애매한 웃음을 짓는 것을 마지막으로, 허묵은 그 꿈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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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잠에 빠졌던 허묵은 무엇에 놀랐는지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아직 제 연정을 절반도 고해 바치지 못했는데 또 쫓겨났다. 저는 믿지 않는 신이라도 걸고 맹세컨대 유연이 온전히 살아 있을 적에도 거짓을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정작 유연은 번번이 여기저기가 잘려나간 제 진심에 부딪쳐 상처입어 왔을 테니 꿈에서라도 마음 한 자락을 내어주지 않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러니, 또다시 아프게 뛰는 심장이 어떠한 통각을 운반하더라도 허묵은 견뎌 내어야만 했다. 그는 생각했다. 빌어먹게도 정교한 이 무대장치에서 퀸의 역할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온 세상을 모두 합쳐도 퀸은 단 한 명뿐이고, 하필이면 자신은 그 퀸을 사랑해 버렸으므로 대책이 필요했다. 화면에서 신경질적으로 깜박이는 텍스트는 퀸의 임무를 다한 유연을 다시 이 세계로 데려올 방법에 대한 연구였다. 유연의 포근한 체온이 다시 한 번 저를 감싸안아 주기를 이제는 너무나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유연 생각만 해도 힘을 받는 하초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남자는 이윽고 옷을 벗어 세탁조에 던져넣고 욕실로 향했다. 짧은 휴식은 이미 끝났다. 다시, 연구에 매진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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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볼펜을 가지고 사무를 보던 허묵의 시선이 펜촉에 가 닿았다. 쉽게 잊을 수 없는 감촉이 다시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그는 잠시 몸을 떨었다.
"가요. 그리고, 다시는 내게 잡히지 말아요."
내가, 다음번에는 당신을 순순히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내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더 멀리 도망쳐야만 할 거예요, 내 아가씨.
오래 전에 제 작은 토끼에게 당부하던 말을, 허묵은 다시 한 번 입 속으로 굴려 보았다. 도망친다 해도 놓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10년이 넘게 그리워하던 사람을, 더구나 제 숨구멍을 어떻게 쉽게 놓는단 말인가. 마지막에 유연의 손을 잡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교수님?"
옆에서 함께 일을 처리하던 조교가 의아한 얼굴로 저를 찾고 나서야 허묵은 제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후로도 블랙 스완의 아레스는 여전히 잔혹하고 연모대학교의 허묵은 여전히 유능했다. 그러나 어느 초봄에 젊은 남녀가 입었던 예복은 그의 서랍 한쪽에서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이미 그 천조각에는 싱그러운 등꽃 향기 대신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담뱃내와 알코올이 배었다. 남자는 역설적으로 그 옷가지를 바라보는 동안에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가 인간적인 감정을 잠시나마 누렸다는 증거가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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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랑을 가르쳐 줄래요?"
그 때, 말을 받는 유연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발갛게 달아올라 화내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웠던 것도 같다.
"유연 씨, 나는 당신의 다정한 연인도 될 수 있고, 가장 친밀한 조력자 역할도 해 줄 수 있어요. 내게서 무엇을 원하죠? 나는 당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니, 당신이 원하는 형태로 함께 있을게요. 내치지 말아요. 나를, 봐 줘요."
사랑해요, 하고 맺지 못한 말이 입에서 끝끝내 맴을 돌았다. 교활한 사랑보다 차라리 순결한 총애를 얻고 싶었다.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 시공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물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제와 부질없는 바람은 아프게 얼어붙어 산산이 부서져 형태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 때 사랑을 말하며 그는 여상하게 웃었다.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평범한 교수학습과정을 거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듯이. 이미 제 안에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자라날 자리가 없음을 제가 가장 잘 알면서 그렇게 눙을 쳤다. 조직의 명령, 그따위 웃기지도 않은 꼭두각시놀음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이 여자라면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여자를 보면 먹은 것이 없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촉각으로 느낄 만큼 심장 박동이 또렷해지는 것을 견디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기나긴 고등교육과정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학습했던 단편적 지식이 제 연정을 또렷이 가리키고 있었으나, 그 모든 감정을 필요없다 치부해 부인하려 했다. 그래, 분명히 그런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게서 도망쳐."
그러나 그 순간 다가오던 입술을, 혀와 숨결을 그는 거부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그 뒷머리를 쥐어잡고 게걸스레 숨을 앗고 체액을 나누고는, 종국에 몸까지 섞은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러한 온기를 나누어 준 단 한 사람은 이제 다시는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의 손으로 그를 제위에 올리고, 또 등을 떠밀었으므로 기다림이 부질없다는 것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큰일을 할 사람이다. 블랙 스완의 아레스라면 모를까 뇌과학자 허묵이 도울 수 있는 일이, 그런 일이……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퇴근길, 그는 늘 가던 제 집 대신 이전에 제 연인이 살던 빌라로 향했다. 죽은 듯이 미동 없는 유연을 앞에 두고는 충족할 수 없는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고자 함이었다. 초인종으로 향하려던 손을 간신히 화분 밑으로 내린 그는 열쇠를 집어들어 익숙한 공간에 발을 들였다. 온통 유연이었다. 금방이라도 유연이 침실 문을 열고 나와 동그란 눈에 반가움을 가득 담고 제 품으로 뛰어 들어올 것 같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유연의 향조차 아까워 차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그는 천천히 방 안의 정경을 제 눈에 새겼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익숙한 만년필이 기어이, 눈에 들어왔다. 유연과 가장 깊숙이 닿았던 물건이었다. 그제야 허묵은 제 숨이 밭아졌다는 것도, 목울대가 뻣뻣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도 인지할 수 있었다. 생(生)의 감각이었다.
지금 사는 거처로 돌아갈 정신은 없었다. 허묵은 그 익숙한 필기구 하나를 쥐고서, 바로 옆집의 문을 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무엇으로부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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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아침이 되어서야 제가 기댄 소파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는 공연히 제 마른 얼굴을 한번 쓸어 보았다. 여전히 물기는 묻어나지 않는 건조한 피부였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고 잊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되짚을 시간은 없었다. 오늘은 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므로, 어떠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다. 그는 나른한 몸을 억지로 추슬러 일으켰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는 동안 남자에게서 노폐물과 함께 나른함까지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물기를 수습하고 남자가 두르는 옷가지는 언제나처럼 깊은 검은색뿐이다. 딱딱한 가죽으로 온몸을 덮고서, 그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눈자위에는 어느새 새빨간 피로감 대신 형형한 살기가 깃들었다. 차가운 분노로 무장한 전쟁의 신 아레스가 천천히 제 마지막 전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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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흑백이었다.
아레스. 2030년 9월 20일, 전투 중 자상(刺傷)으로 사망.
블랙 스완의 마지막 전투, 세간에서 신의 학살이라 부르는 사건을 정리하느라 간부들은 며칠째 밤을 새웠다. 사후처리에는 사실상 블랙 스완이라는 거대 조직을 세상에서 없애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어, 이미 분위기는 어중간하게 뒤숭숭해져 있었다.
그러나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레스가 손수 입력하는 그 문장만큼은 모두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아레스!"
비명 같은 힐난이 온 방을 울렸다. 누군가 잘못 떨어뜨린 에너지음료 캔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조차 묻힐 만큼 요란한 반발이었다.
"불만 있나? 난 할 만큼 했어."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듯이 너무나 여상한 어조였다. 심지어 그는 제가 작업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네가 가장 먼저 여길 박차고 나갈 거라는 생각은 물론 진작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어야 해?"
멀리서 파괴된 건물의 배상 비용을 계산하고 있던 아르테미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내 기억에, 너희도 나와 비슷한 나이에 조직에 들어오지 않았나? 여기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 수렁으로 보였다니 그거 참 부럽군."
앉은 자리에서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하는 아레스에게선 이미 아무런 미련도 느낄 수 없었다. 그와 가장 오래 일한 12주신이 가장 먼저 그 굳건한 달관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레스는 틈을 허용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과학자로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실험은 이미 실패했다. 실패한 프로젝트에 남고 싶은 사람은 없어."
"하지만 퀸이……."
이번에 이의를 제기한 건 하데스였다.
"퀸은 폐기했다. 그 현장은 이미 공개한 것으로 아는데?"
아레스는 제 발치로 굴러온 캔을 밟아 우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대리석에 금속이 눌리는 소리가 그들 주위를 맴돌다 밟혀 사라졌다.
"코드네임 아레스, 실험번호 없음. EVOLVER 창조 계획은 연구 윤리에 맞지 않으므로 폐기한다. 코드네임 퀸, 실험번호 1300, 개체의 행동 방향과 조직의 목표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폐기한다."
단숨에 제 폐기 사유를 읊어대는 그 목소리에 감정이라곤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되겠나."
다시, 아레스는 가장 잔인하고 냉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납작하게 눌린 금속덩어리를 주워 재활용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그는 그대로 남은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사자가 제 절명을 선언한 자리에서, 누구도 그 죽음이 너무하다 말할 수 없었다. 당장 제 주변 인물들이 그런 식으로 폐기당해 실제로 죽어가는 것을 한 번씩은 본 사람들이므로 더하였다. 덧붙여 아레스를 블랙 스완에 잡아 둘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것을 거기 모인 모두가 알았으므로 그 죽음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전장의 신이라는 별칭에 맞지 않게 너무나 쉬운 죽음이었다. 물론 블랙 스완의 마지막 전투에서 총검을 맞고 불귀의 객이 된 자들이야 많았으나, 아레스는 그 때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살육을 하는 쪽이었지 값없이 스러지는 목숨들 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레스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고 뇌과학자 허묵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조직에서 퀸이라고 부르던 그 작은 아가씨조차 존재하지 않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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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잠들지 못한 여인은 생경한 빛을 느끼고 눈을 떴다.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어요."
유연이 온몸에 청량한 빛을 두르고 서 있었다. 그 얼굴은 얼핏 홀가분해 보였다. 퀸은 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화해했음을 알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안색이 한결 낫구나. 마음은 좀 풀렸니?"
퀸은 이번엔 친근한 언니의 미소를 지으며 유연을 맞았다.
"네. 이젠 다시 그를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연은 퀸을 대하고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저런, 아레스가 들으면 서운해하겠구나. 네가 사랑해 주기만을 기다렸던 아이니까."
"아레스는 강하니까,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
"허묵은 어쩔 셈이니?"
"열심히, 보듬어 줘야겠죠?"
"정말, 많이 컸구나."
"이제, 돌아갈 거니?"
"가야죠. 할 일이 많으니까요."
"잘 가고, 조심하렴. 네가 이 공간을 나서면 나는 이전처럼 너와 항상 함께하지는 못할 거야. 네가 한 번 죽었어야 할 그 순간에 세계의 궤도를 바꾼 게 나니까. 그 대가를 받아 나는 이제 사라질 거란다. 그러면, 내가 가진 퀸의 권능은 모두 네게로 귀속될 거야."
"당신에게 권능을 받는 것으로 내가 퀸이 되나요?"
"아니지. 힘을 줄 수는 있지만 활용은 네가 해야 해. 알고 있잖니. 언제, 어떤 방식으로 힘을 개방할지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게다."
"퀸, 당신은 퀸으로서 만족했나요?"
"너무나 오래 고독했지만, 네가 건강하게 각성할 것 같아서 흐뭇하구나."
"행복하게 살렴, 내 아이야."
새하얀 빛이 무한한 어둠을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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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은 허묵이 가장 평온하게 잠든 틈을 타 그의 꿈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 몸을 움직이기는 힘이 들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꿈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이조차 그답다고 생각하며 유연은 그 앞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교수님, 허묵씨."
꿈 속에서도 서류를 잔뜩 쌓아 놓고 작업에 골몰하던 허묵은 유연의 부름에 놀라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 서슬에 방금까지 그가 작성하던 서류는 엉망으로 흩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쓸 정신은 남아 있지 않았다.
"유연? 정말 당신입니까?"
자유롭게 움직이는 유연을 보고서 그는 오히려 일어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유연이 정신을 잃은 그 순간 이후 그는 이렇게나 자연스러운 유연을 지금 처음 봤다.
"네, 저예요. 오랜만이죠."
유연은 놀란 눈을 하고 굳어진 허묵 대신 제가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갔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내 작은 바보."
허묵은 그제야 주박이 풀린 사람처럼 유연에게로 달려가 그 작은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이제는 온전하게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이 가장 간절히 기다려 온 선언이었다. 말하는 유연도, 듣는 허묵도 그 말에 목이 메었다. 서로를 품에 안고서 울고 웃는 둘의 맞붙은 몸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달았다.
"돌아오는 건가요?"
의문보다 갈망이 더 짙은 물음이었다.
"네, 당신에게로."
유연은 그 갈망 앞에 뒷말을 삼켰다.
"기다려 줘요. 내가 당신을 깨울 방법을 찾고 있어요."
허묵은 유연이 삼킨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챘으면서도 짐짓 유연을 제 세상으로 돌리는 이야기만을 꺼냈다. 아직 이별을 다시 말하기는, 제 마음이 괜찮지 못했다.
"퀸이 그러더군요. 몸을 찾는 데엔 내 의지만이 중요하다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빈틈없이 끌어안은 몸이니 감정 한 자락이 다른 데로 새는 일은 전연 없어, 유연은 급격히 불안해진 허묵의 심장 박동을 듣고는 이내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제가 듣고 본 것을 고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유연은 발을 돋워 걱정을 쏟아내는 입술을 제 것으로 부드럽게 막았다. 잠시 멈칫하던 허묵은 이내 게걸스럽게 유연의 입 안을 탐했다. 나누고 나누어도, 앗고 앗아도 부족했다. 다시, 춘정이었다. 허묵은 키스하는 내내 유연의 뒷머리를, 허리를, 다리를 옭아맸다. 다시는 놓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꼼짝없이 붙어서 이제는 자리에 눕게 된 유연이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님, 아레스. 어쩌다가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거예요."
유연은 억지로 그의 어깨를 밀어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랬다. 제 꿈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 연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당신을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유연. 내 작은 바보, 내 심장의 주인. 내 유일한 빛. 나는 그것 하나만이 다시 두려워요. 당신이 없는 시간은 전부 암흑이었어요. 또다시 그 시간을 견디게 하지 말아요."
숨소리가 반이나 섞인 애원이었다. 이미 유연의 부피감이 사라지고 있었으므로, 허묵은 더욱 절박해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과는 항상 연결을 유지할게요."
겨우 그 말만을 남기고 유연은 늘 있던 순백색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이 공간이 무섭지도, 지긋지긋하지도 않았다. 저의 가장 소중한 연인을 방금 만나고 오는 길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날은 유연도 허묵도 단잠을 깊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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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허묵은 약속한 시각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눈을 뜬 제 연인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열리기를 고대하던 눈동자를 실제로 보니 감정이 벅차올랐다. 실험실의 냉동고 안에서 일어나는 유연은 허묵의 눈에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어느 나라의 공주 같았다.
"내 세계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유연씨."
그리고 그는 왜 그날의 왕자가 공주에게 키스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 순간 깨달아 버렸다. 일어나 앉은 유연은 붙잡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름다움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머리가 제어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눈앞의 여인을 끌어안았다.
"내 세계이기도 했죠."
유연은 웃음을 머금고 제 남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단박에 달려와 머리를 부비는 양이 어쩐지 대형견 같아서 귀여웠다.
"여기서 다시는 당신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거기까지 듣고 유연은 허묵의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허묵의 귓불을 핥아올리며 뒷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지킬게요."
작은 흔들림조차 없는 눈빛으로 유연은 그렇게 선언했다.
"유연씨?"
정확히 제 귓가에 꽂힌 음성이건만, 허묵은 계속해서 그 말을 확인하려 들었다.
"네, 교수님. 나는 당신의 퀸이니까요."
이제 유연은 허묵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유연씨."
허묵은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당신이 온몸에 피를 두르고 나를 지키던 모습을 봤어요."
유연을 안은 허묵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남자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기어이 목소리는 떨려서 나왔다.
"내 사랑은 처음부터 당신이었어요."
유연은 청량한 웃음을 겨우 깨문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웃음은 곧 옆에 섰던 남자의 품에 갇혀 간지러운 진동이 되었다. 허묵은 유연을 끌어안고 그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 질투가 많고, 바보 같아 질릴 만큼 당신을 사랑해도, 그런 나를 사랑해 줄건가요? "
달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그 목소리에는 이미 애정이 담뿍 담겼다. 유연은 그의 눈동자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아 볼을 붉혔다.
"내게 부족한 부분은 당신이 아니면 채울 수 없어요. 그러니, 허묵. 당신은 평생 나를 사랑해 줘야 해요."
그리고 둘 사이에는 더는 망설일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유연은 팔을 뻗어 저를 품에 가둔 허묵을 또한 옭아매었다.
"사랑해요."
더는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도, 사랑해요."
또한, 아낄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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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소음조차 탈출할 수 없는 단단한 밀실에서 젊은 남녀는 사력을 다해 대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 쪽의 일방적인 사냥에 가까운 행위였으나 여자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거의 다 왔어요. 내가 파악한 퀸의 능력을 이제 모두 쓸 줄 알잖아요."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여자는 더 듣지 않아도 남자의 다음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했다. 퀸이 알려 준 능력 승계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니, 아직 당신이 말한 아공간에 들어갈 수 없어요. 조금만 더."
또다른 이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을 돕자니 허묵은 별 흥이 나지 않았으나, 유연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후로 제가 사랑한 여인의 의협심마저도 사랑하게 된 그는 기꺼이 그 마음아픔을 감내하기로 했다.
"한 번만 더. 여기까지만 해 보고 나머지는 내일 하죠."
그리고 또다시 대련이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순간, 유연의 눈앞에 문이 열렸다. 방금까지 피곤한 표정이던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 나의 아레스. 당신이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세상을 바로잡으러, 나랑 같이 갈래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커다란 문은 유연만을 초대하였으나, 허묵은 이전과 같은 상실감을 느끼지는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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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일한 주인이자 영원한 왕이시여."
허묵은 허공에 대고 복종의 예를 취해 보였다. 감히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가장 긴밀한 주종간의 의례였다.
엎디어 주군의 발에 깊이 키스하고 감아내린 눈에는 이미 늦어버려 수습할 수 없을 연정과 욕망이 그득히 고였다 떨어졌다.
그의 등 뒤로, 찬란하여 아득한 빛을 내뿜는 거대한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닫힌 문 안에서 그는, 겸허하게 마지막을 받아들였다.
폭력적일 만치 밀려들어오는 제 것이 아닌 기억이, 그가 아직 인간으로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아, 나의, 유일한 주군이여. 당신의 세상에 비로소 함께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신조차 들어 줄 수 없던 소원을 당신이 가납하여 주셨으니, 남은 생은 오로지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육체가 사라져 뱉지 못한 말이 문 너머로 스며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동그랗게 젖은 자국 두 개가 햇빛을 받고 제 그늘을 더욱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끝없는 시공에 갇힌 그의 마지막 흔적은 해가 채 기울기 전에 말라붙었다.
블랙 캐빈에 허묵이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와 있던 유연은 그 순간 수많은 삶 속에서 그와의 기억을 단번에 끄집어낼 수 있었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제 연인을 돌려받은 왕은 우는 얼굴로 웃었다. 퀸이 보여 준 엄혹한 풍경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함께한다면 두려울 것은 없을 터였다. 왕의 충성된 기사는 제 주인을 모시고 유일하게 남은 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